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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국권 피탈과 의병 전쟁

〔학습 개요〕

러⋅일 전쟁 후, 대한 제국의 외교권은 강압적으로 맺어진 을사조약에 의해 일제에게 박탈당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에 대항하여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항쟁을 여러 모로 전개하였다. 애국 지사들의 순국이 잇달았고, 고종 황제는 해외에 특사를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을 국제적인 협조로 막아 보려 하였다.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무기를 들고 항쟁을 벌인 의병 활동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의병 활동은 그 조직과 규모가 커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학습 문제

1. 일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 나라의 국권을 침탈하였는가?

2. 우리 민족은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어떻게 전개하였는가?

3. 의병의 구국 항전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4. 일제의 침략을 막기 위한 의사들의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5. 독도와 간도에 대한 일제의 침탈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일제의 침략과 을사 조약

러시아는 3국 간섭에서 성공함으로써 만주에 그 세력을 키웠고, 나아가 우리 나라에까지 침투하여 각종 이권을 빼앗아 갔다. 러시아는 남하 정책을 추진하면서 마산포에 해군 기지를 만들려고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 세력의 증대로 러시아와 일본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이 때, 세계 여러 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영⋅일 동맹을 맺어 일본을 도와 주었다. 마침내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 대립은 러⋅일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우리 나라의 각 지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여 군사상 필요한 장소를 마음대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전쟁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경부선, 경의선을 부설하는 등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자행하였다.

그 후, 일본은 전세가 그들에게 유리해지자, 우리 나라 정부에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우리 나라에 외국인 고문을 두어 내정을 간섭하였는데, 재정, 외교뿐만 아니라 군사, 교육, 경찰 분야에까지 고문을 임명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정치, 외교에 관한 자주권은 손상을 입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자,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였다. 즉, 고종 황제와 내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대신들을 위협하는 가운데 일방적으로 을사조약을 발표하였다. 이 조약은 우리 나라의 외교권만을 일본이 관장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정치 전반을 간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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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풍자도
을사조약 풍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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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 반대 운동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에 반대하는 항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장지연은 황성 신문에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논설을 썼다. 장지연은 이 글에서, 일본의 침략을 공박하는 동시에, 당시의 매국 대신들을 격렬히 비난하였다. 제국 신문, 대한 매일 신보 등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민족 정신과 항일 운동을 고취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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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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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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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상설, 최익현 등 전직 고관과 유생들도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매국노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서울에 있는 상가가 철시하였고, 학생들은 자진하여 휴학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종 황제에게 조약을 파기하도록 탄원하기도 하였다. 한편, 국운이 기울어 감을 원통하게 여긴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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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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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국민들이 을사조약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 고종 황제는 대한 매일 신보를 통하여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러시아, 미국 등에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리고 미국이 협력할 것을 믿고, 헐버트를 황제의 특사로 파견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편,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고종 황제는 이상설, 이준, 이위종 세 사람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불법적 행위와 침략 사실을 널리 알려 국제 여론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였다(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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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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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특사는 헤이그에 도착하자, 그들이 머무르는 집에 태극기를 내걸고 정식 외교 사절단으로서 활약하였다. 그들은 영국, 미국, 프랑스 대표단에게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만국 기자 협회에서도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국제 정세는 우리 나라에게는 불리한 상황이었고, 일본의 방해 공작이 심하여 세 특사는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에, 이준 열사는 통분한 나머지 이국 땅에서 순국하였다.

군대 해산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삼아, 그들의 침략 정책을 반대해 온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고종 황제의 퇴위에 대하여 국민들은 집회 또는 시위를 통해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군은 무력으로 이를 막았다.

곧 이어 일본은 한⋅일 신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각부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하였고, 이어서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로 대한 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때, 시위대의 제1대대장 박승환이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자결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시위대의 군인들은 서울 시내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원주, 강화, 충주, 진주 등지의 진위대도 궐기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이들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과 합류하여, 주권 수호를 위한 항일 무장 투쟁을 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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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의 군인들
대한 제국의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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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쟁

일본의 침략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의병 활동은 국권을 지키기 위한 구국 전쟁으로 전개되었다.

의병의 활동은 이미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격하여 일어난 바 있었다. 의병은 처음에는 위정 척사 정신을 이어받은 유생들이 지도자가 되고, 민중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다음부터는 범국민적인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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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들
의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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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홍성에서 민종식 부대가 크게 기세를 올렸고, 전북 태인과 순창에서는 최익현 부대가 활약하였으며, 경상도 방면에서는 평민 출신인 신돌석 부대가 크게 활약하였다.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가담하게 되어, 의병 활동은 그 양상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의병 부대는 더욱 조직적으로 활동하게 되었으며, 다수의 신식 무기도 갖추게 되어 전투력이 강화되었다. 이리하여 의병 활동은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여 갔다.

이 때, 각지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기도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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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궐기
의병의 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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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 활동은, 무기와 전투 경험면에서도 열세였을 뿐 아니라,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인하여 점점 약해져 갔다. 그러나 일부의 의병 부대는 새로운 항쟁 근거지를 찾아서 만주와 연해주 지역으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독립 투쟁을 계속하였다.

의거 활동

의병 부대의 대일 항쟁이 전개되는 동안에, 침략의 원흉과 매국노를 없애어 민족의 원한을 풀고, 침략 세력을 막으려는 의거 활동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일본 정부의 추천으로 우리 나라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일본의 우리 나라 침략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격분한 전명운, 장인환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 내에 있는 우리 나라 사람들이 조국 수호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우리 나라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은,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가 대륙 침략을 도모할 목적으로 러시아 대표와 담판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도착하자, 그를 사살하였다(1909). 안중근의 의거는 일본의 침략에 대한 우리 민족의 강렬한 독립 정신을 잘 나타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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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직후의 안중근 의사
의거 직후의 안중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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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내에서는 친일적인 인사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높아져 갔다. 특히, 나철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의 숙청을 시도하였고, 이재명 등은 일본의 앞잡이 구실을 해 온 이완용의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독도와 간도

우리 나라를 침략하면서 일본은 독도를 강탈하고, 간도를 청에 넘겨 주었다.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서, 울릉도가 삼국 시대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이후 우리 나라 영토로 되어 왔다. 조선 태종 때에 유민의 방지를 위하여,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본토로 옮겨 살게 하면서 울릉도와 독도의 관리가 소홀해졌다.

그 후, 숙종 때 울릉도에 나갔던 동래의 어민 안용복이 불법으로 침범한 일본 어부를 쫓아 버리고,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 나라의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어민들은 몰래 울릉도의 목재를 벌채하고, 고기잡이를 하는 등 이 곳을 자주 침범하였다. 이에, 울릉도 순찰에 나선 우리 나라의 관리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어, 조선 정부는 일본에 항의하였다. 그 후, 정부에서는 울릉도 이주를 장려하고, 관청을 두어 독도까지 관할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강제로 독도를 일본 영토에 편입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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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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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간도는 본래 고구려, 발해의 땅으로,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뒤에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후, 이 지역이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다른 민족의 활동을 금하였다. 그러나 숙종 때 국경선을 확정지으면서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움으로써 간도가 우리 나라의 영토임이 확실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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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백두산 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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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간도에 이주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고, 경작지를 넓히면서 생활 터전을 마련하자, 청은 우리 나라 사람의 철수를 요구하며 간도 귀속 문제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 곳을 우리의 영토로 다스리기 위하여 간도 관리사를 파견하여 주권을 행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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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해외 이주
한민족의 해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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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일본은 만주 침략을 위해, 남만주 철도(안봉선)에 대한 이권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 주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1909).

◇ 학습 정리 ◇

1.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후,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자행하였다.

2. 우리 민족은 일제의 국권 침탈에 대항하여 의병의 구국 항전, 의사⋅열사의 의거 등 국권 수호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3. 의병의 구국 항전은 을사조약의 강제 체결을 전후하여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대한 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 후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4. 침략의 원흉과 매국노들을 처단하고자 의사⋅열사의 의거 활동이 국내외에서 잇달아 일어나 민족 정기를 드높였다.

5.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켰고, 청과 간도 협약을 맺어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었던 간도를 청에 넘겨 주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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