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5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5차(하)
  • Ⅲ. 민족 독립 운동의 전개
  • 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4. 민족 문화 수호 운동

〔학습 개요〕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말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뜻있는 민족 지도자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즉, 국학, 언론, 교육, 종교, 문학, 예술 활동 등을 통해 주체 의식과 민족 문화에 대한 긍지를 살리는 데 힘썼다.

언론 기관은 민중을 계몽하여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고, 교육자들은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민족 교육 운동에 힘썼다. 그리고 민족 정신을 일깨우고, 우리말과 우리글을 지키려는 노력은 국학 연구로서 나타났다.

한편,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민족 감정을 되살리려는 운동이 전개되어 민족 의식을 앙양하였다.

학습 문제

1. 일제가 대륙 침략을 감행하였던 시기의 식민지 지배 정책은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2. 민족 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어떠한 성격을 띠고 있는가?

3. 국어와 국사의 연구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4.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민족의 저항 의식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우리 나라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감행되면서 그들의 병참 기지로 되어 갔다. 또, 일제의 침략 전쟁에 이용되어, 우리 민족과 민족 문화도 말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른바 내선 일체, 황국 신민화 등의 허울 좋은 구실에 의해 학교에서는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당하였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도 금지되었다. 또, 한글로 된 신문도 모두 폐간되었다.

한편,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한글 학자들이 체포되었고, 진단 학회가 해산되었으며, 국어와 국사에 대한 연구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각지에 세워진 일본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당하였으며, 또 우리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당하였다.

이어서, 태평양 전쟁 중에는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이 크게 부족하게 되자, 우리의 청⋅장년들이 강제로 징용되어 광산이나 공장에서 혹사당하였고, 학도 지원병제와 징병제의 실시로 우리의 청년 학생들이 각지의 전선으로 끌려갔다. 뿐만 아니라, 여자들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침략 전쟁의 희생물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물자뿐만 아니라 인력까지도 그들의 침략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었다.

확대보기
징용되어 혹사당하는 우리 동포들
징용되어 혹사당하는 우리 동포들
팝업창 닫기

언론 활동

언론 활동 역시 민족 운동에 이바지하였다. 3⋅1 운동 직후, 일제의 회유 정책에 따라 어느 정도의 언론, 출판 활동이 허용되어 조선 일보, 동아 일보 등이 창간되었다.

이들 민간 신문은 일제의 악명 높은 검열 제도에 저항하면서, 민족 사상의 고취, 민족 의사의 대변, 민족 문화의 계승, 재난 동포 구호 등의 운동을 폈다. 특히, 한글의 보급, 문맹 퇴치 등의 계몽 운동을 펴 나갔다. 그러나 이들 언론 기관은 일제로부터 기사 삭제, 신문 압수, 언론인 구속, 발간 정지 등의 탄압을 계속 당해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0년경에는 모든 우리말 신문과 잡지가 폐간되고 말았다.

확대보기
검열로 삭제된 신문
검열로 삭제된 신문
팝업창 닫기

국학 연구

민족의 문화 투쟁은 국학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본격화되었다. 당시 일제는, 우리 나라를 철저히 지배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 풍속 등을 조사하였는데, 고의로 우리 문화를 나쁘게 평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놓았다. 이에, 국어와 국사 등의 민족 문화를 연구함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이 일제의 그릇된 한국학 연구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먼저, 국어 연구에서는 이윤재, 최현배 등 주시경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선어 학회가 중심이 되어 한글의 연구와 보급, 한글 사전의 편찬, 맞춤법과 표준어의 제정 등 큰 업적을 남겼다. 또, 한글날을 제정하여 민족 문화의 선양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우리말 큰사전의 머리말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 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그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및 물질적 재산의 총 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확대보기
주시경
주시경
팝업창 닫기

국사 연구에 있어서는 민족의 전통과 긍지를 살리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민족사 연구를 해 나갔다. 특히, 박은식, 신채호, 정인보 등이 민족주의 사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한편, 일본 어용 학자들의 왜곡된 한국사 연구에 반발하여, 진단 학회를 조직하여 진단 학보를 발간하면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노력하였다.

확대보기
진단 학보
진단 학보
팝업창 닫기

그러나 국학 운동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른바 조선어 학회 사건을 구실로 삼아 국어 학자들이 압박을 받았고, 진단 학보도 폐간되어 마침내 국학 연구의 길이 막히고 말았다.

민족 교육 운동

일제의 식민 정책이 추진되면서 우리의 청년들은 식민지 교육, 즉 일본 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이에 순응하게 하는 교육을 강요당하였다. 그리하여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만이 실시되고, 고등 교육은 실시되지 않았다.

이에, 뜻있는 민족 지도자들은 민족의 장래가 교육에 달려 있다고 믿어 야학, 서당, 강습소 등을 많이 개설하여 교육 활동을 펴는 한편, 사립 학교의 설립에도 힘썼다.

이들 학교에서는,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서 우리 나라의 글과 역사를 가르쳤으며, 애국심과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데 주력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스스로 고등 교육을 실시하기 위하여 조선 민립 대학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고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폈으나, 일제의 방해로 끝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확대보기
농촌 계몽 활동
농촌 계몽 활동
팝업창 닫기

종교 운동

종교 활동에 있어서는 천도교, 대종교 등 민족 종교는 물론, 개신교, 천주교, 불교 등도 여러 가지 방법으로 민족 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종교는 교단을 만주로 이동하여 구국 종교로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무장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천도교에서는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펴내 사회 계몽 운동에 힘썼다.

천주교에서는 일찍부터 사회 사업에 공헌하고 있었으며, 애국 계몽 운동에 공헌해 왔던 개신교는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 걸쳐 민족 운동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특히, 신사 참배에 항거함으로써 그 지도자들의 일부가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도 일찍이 불교 혁신 운동이 일어나 한용운이 불교 유신론을 폈으며, 박중빈의 원불교는 저축 운동을 통해 민족의 자립 정신을 키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것은 모두 종교를 통한 민족 운동의 한 면모라 할 수 있다.

근대 문학 활동

한말에 일어난 신문학은, 신체시를 발표한 최남선과 소설의 새 경지를 개척한 이광수의 활동에 의하여 근대 문학으로 발전되어 갔다. 3⋅1 운동을 전후해서는 문학 활동이 보다 활발해져서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가 나왔다.

확대보기
계몽 잡지(소년) 표지(좌)와 문예 잡지(백조) 표지(우)
계몽 잡지(소년) 표지(좌)와 문예 잡지(백조) 표지(우)
팝업창 닫기

문인들은 동인지나 신문, 잡지에 작품을 실어 우리의 전통을 살리고, 민족 의식을 불러일으켜 줌으로써 민족 문화의 향상에 이바지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에 대한 투쟁 정신을 고취하였다.

예술 활동

예술 활동에 있어서도,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살려 가며 민족 문화의 전통을 이어 가고 민족 의식을 드높이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신극 운동에 있어서는 토월회가 조직되면서 민족적인 내용을 지닌 작품들을 많이 공연하였다. 토월회는 전국을 자주 순회하면서 민족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확대보기
토월회 창립 동인들
토월회 창립 동인들
팝업창 닫기

영화에 있어서는 나운규가 민족의 저항 의식과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부각시켜 많은 관객을 감동시켰다.

미술에 있어서는 안중식, 이중섭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음악에 있어서는 홍난파 등이 활약했으며, 봉선화, 고향 생각, 반달 등 민족적 감정이 어린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학습의 도움 글〕

일제의 징용

일제는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후,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인력을 한국에서 수탈하여 갔다. 1945년까지 국내에서의 한국인 강제 동원은 480만 명에 달하였고, 일본으로 징용되어 간 한국인은 113만 명에 이르렀다. 징용된 한국인들은 주로 탄광, 발전소, 철도, 군수 공장, 비행장 등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징용되어 끌려간 노동자의 체험담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등의 상처는 썩어서 더욱 심해져 갔다. 여기서는 조선말을 쓰면 한 끼의 밥을 줄여 버렸다. 밥이라고 해도 콩을 쪄서 안남미와 섞은 것이었다. 국은 소금국으로, 건더기가 없는 것이었다. 갱내에서 목이 말라 갱내의 붉은 물을 마시면 설사를 심하게 했다. 그래도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시켰다.

술이나 담배, 약품 배급은 조(組)에서 가로채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당시 하루 임금은 2원 35전인데, 합숙소값으로 1원 50전을 떼었다. 그러나 작업화가 매일 떨어지기 때문에 한 켤레를 3원 50전으로 매일 사게 하여 매일 적자가 났다. 돈을 주면 도망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라다 조에서는 서울에서 온 교양 있는 집안의 아들이 도망치다가 붙들려 너무 심하게 매를 맞아 미쳐 버렸다.

집단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을 잘못 알고 건너다가 물 속에 빠져 죽는 예가 많았다. 봄이 되어 눈이 녹으면, 그 시체가 이시카리 강 언저리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이 가끔 발견됐다.

1943년 12월 18일이었다. 임금이 1천 얼마로 체불되었는데, 고다루에 도착해서 준다고 했으나 지불해 주지 않았다. 하라다 조에 가서 독촉해 보니, 3백 원을 가족에게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3개월을 기다려도 조선에서는 돈을 받았다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하략)…

〈김대상, 일제하 강제 인력 수탈사〉

◇ 학습 정리 ◇

1.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우리 민족과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는 민족 말살 정책을 감행하였다.

2. 민족 문화의 전통을 지키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3. 국어와 국사 등을 연구하여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국학 운동이 조선어 학회의 학자들과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4. 문인들과 예술가들은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면서 민족 의식과 저항 의식을 고취하려고 노력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