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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 분단의 시련

〔학습 개요〕

남한에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되어 발전하고 있을 때, 북한에서는 공산주의 세력이 정권을 세워, 독재 체제를 이룩하면서 무력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 공산 집단은 마침내 불법 남침을 개시하여 우리 민족은 동족 상잔의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대한 민국은 한때 국가 존망의 위기에까지 몰리게 되었으나, 국민들의 자유 조국 수호를 위한 투쟁과 자유 우방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공산군을 북으로 쫓아 내면서 통일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공방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휴전이 성립되었다.

휴전 후, 대한 민국은 전쟁 중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기 위하여 재건에 박차를 가하였다.

학습 문제

1. 광복 직후 남북한의 경제적 차이는 어떠하였는가?

2. 북한 공산군의 남침을 물리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인가?

3. 6⋅25 전쟁에 유엔군이 참전한 의의는 무엇인가?

4. 대한 민국은 왜 휴전에 반대하였는가?

북한의 공산화

소련군 사령부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 민주당의 민족주의자들을 제거하였다.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할 때에 뒤를 따라 들어온 김일성 등 소련파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실권을 장악하고, 독재 체제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또, 이들은 북한의 공산화를 서둘러 추진하였다.

1946년 2월에는 사실상의 공산 정권인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수립되었고, 김일성이 그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이미 조직된 각급 지방 인민 위원회들이 기반이 되어 조직되었는데, 후일에 수립된 북한 공산 정권의 모체가 되었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토지 개혁 법령, 중요 산업 국유화 법령 등을 발표하여 사회주의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찾아 월남하였다.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는 1947년 2월에 북조선 인민 위원회로 발전하였고, 1948년 9월에는 인민 위원회가 기반이 되어 소위 인민 공화국이라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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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여성들의 행진 모습
북한 여성들의 행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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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자들의 남한 교란

대한 민국 수립 당시의 우리 나라 경제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다. 38도선의 국토 분단으로 경제 생활권마저 두 조각으로 갈라졌고, 지하 자원과 산업 시설이 편재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북한이 풍부한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 및 공업 시설을 가진 데 비하여, 남한은 농업이 경제의 중심을 이루었고, 경공업 시설밖에 없었으며,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도 부족하였다.

이와 같이 경제적으로 불리했던 대한 민국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전력의 공급마저도 끊어 버렸다.

한편, 공산주의자들은 남한의 사회 질서를 교란시키기 위하여, 각지에서 폭동과 파업 등을 일삼았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한 민국 정부의 수립을 전후하여 일어난 제주도 4⋅3 사건과 여수⋅순천 반란 사건이었다. 이들 사건은 우리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평온과 질서를 되찾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지나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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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진압에 나선 국군과 경찰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진압에 나선 국군과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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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발발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통치 기반을 정비한 후, 군사력을 증강하여 대한 민국에 대한 무력 남침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들은 소련과 비밀 군사 협정을 맺어 소련의 군사 원조를 받았고, 최신 무기를 공급받아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6⋅25 전쟁 직전에 북한의 병력은 20만 명에 이르렀고, 전투기와 탱크 등의 현대식 무기까지 갖추었다. 그러나 남한의 병력은 10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무기와 장비도 뒤떨어진 상태에 있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군사력을 증강하면서 무력 남침을 준비하고 있을 때, 미국은 이러한 사태를 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을 철수시켰다. 또, 미국의 국무 장관은 한반도가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된다고 선언하였다. 이와 같은 미국의 조치와 선언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침 야욕을 고무시킨 셈이 되고 말았다.

한편,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겉으로는 평화 공세를 펴면서 그들의 남침 의도를 숨기려고 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마침내 북한 공산군은 38도선의 전 지역에 걸쳐 불법 남침을 감행하였다. 우리의 국군은 조국 수호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빈약한 무기를 가지고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국군은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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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하는 북한 공산군
남침하는 북한 공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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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피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저지선까지 후퇴한 국군은, 이 곳을 거점으로 반격 작전을 준비하였다. 나이 어린 학도병들도 조국 수호를 위해 책 대신 총을 들고 국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다.

6⋅25 전쟁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한반도를 적화시킬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다. 북한의 남침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 준비한 것으로서,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불행한 동족 상잔의 비극을 초래하였다.

공산군 격퇴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 있자, 미국의 요구에 의해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산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을 비롯한 우방 16개국이 세계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하여 우리 나라에 군대를 보내 와, 유엔의 깃발 아래 국군과 함께 힘껏 싸웠다.

한때 낙동강까지 후퇴하여 전세가 매우 위급하였으나, 재정비, 강화된 국군과 유엔군은 용감히 싸워 서울을 수복하였다. 이어서, 이 기회에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38도선을 넘어 공산군을 쫓으며 북한으로 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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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평양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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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은 압록강과 두만강 부근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으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불법 개입으로 다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공군은 인해 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때 서울을 다시 내주었으나,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적을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격퇴하였다. 그 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전쟁에 지친 공산군은 남침의 실패를 깨닫고 소련을 내세워 휴전을 제의해 왔다. 이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2년여에 걸쳐 휴전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때, 우리 겨레는 완전 통일이 아닌 휴전에 반대했으나, 결국 휴전이 이루어졌다(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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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전황
6⋅25 전쟁의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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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복구

6⋅25 전쟁으로 우리 민족이 입은 손실은 막대하였다. 국토의 대부분이 황폐해졌으며, 인명의 피해도 막심하여 전투에 의한 사상자가 150여만 명이었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재난을 당하였다. 또, 전쟁으로 인한 물질적인 피해도 컸다. 많은 건물을 비롯하여 도로, 교량, 공장, 발전 시설 등이 파괴되었다.

휴전이 성립된 후, 대한 민국은 황폐한 국토의 재건과 부흥에 전력을 기울였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들도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복구 사업이 국민적 열의와 참여에 의해 급속히 진행되어 생산 활동도 활발해졌다. 교통⋅통신 시설은 나날이 개선, 발전되었고, 발전소 등 기간 산업 시설이 마련되어 갔다. 교육 시설도 확충되어, 전쟁 이전보다 활발한 교육 사업을 펼 수 있었다.

한편, 국방에 있어서도 군사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미국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맺어 공산군의 재침에 대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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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상호 방위 조약 조인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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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교훈

6⋅25 전쟁은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으로서, 민족적인 비극이었다.

그러나 6⋅25 전쟁을 계기로 우리 국민의 반공 신념은 더욱 굳어졌다. 그것은, 선전과는 다른 그들의 정체를 실제로 보았기 때문에 얻어진 귀중한 교훈이었다. 전란 중에 수많은 북한 동포가 자유와 평화를 찾아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기고, 4만여 명의 공산 포로가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하고 자유의 땅에 남은 것만 보아도 그 실체를 명백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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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택한 반공 포로들
자유를 택한 반공 포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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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밖으로는 세계사의 진행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즉, 유엔군이 세계 각국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집단 안전 보장의 군사 작전을 폈으며, 자유 세계가 공산 침략에 대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가지고 대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 학습 정리 ◇

1. 광복 직후, 남한은 농업과 경공업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었고, 풍부한 지하 자원과 수력 자원을 가진 북한은 중공업이 산업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2. 6⋅25 전쟁 때, 우리 국민은 투철한 반공 정신과 조국 수호의 굳은 결의로 유엔군의 도움을 받아 공산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3. 유엔군의 참전은 세계의 평화와 자유 수호를 위한 집단 안전 보장의 군사 작전이었다.

4. 우리 겨레는, 민족의 완전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고 믿어 휴전을 반대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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