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6차(상)
  • Ⅲ. 중앙 집권 국가의 형성
  • 2. 영토의 확장

2. 영토의 확장

학습 개요

삼국은 안으로 정치 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밖으로 주변 세력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면서 중앙 집권 국가를 건설하였다.

고구려는 중국 세력과 싸우면서 발전하였다. 태조왕 때에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닦은 후, 소수림왕 때에 내정을 정비하였고, 이어 광개토 대왕, 장수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면서 동북 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면서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근초고왕 때에는 마한을 정복하고 중국에 진출하는 등 크게 융성하였으나, 이후 쇠퇴하여 고구려, 신라와의 경쟁에서 뒤지고 말았다.

신라는 사회 발전이 다소 늦었으나,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때를 거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특히, 진흥왕 때에는 한강 유역을 장악하여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학습 문제

1. 고구려가 전성 시대에 지배한 영토는 어떠하였는가?

2. 백제가 진출한 해외 지역은 어느 곳이었는가?

3. 삼국이 다투어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팽창

압록강의 중류 유역에서 일어난 고구려는 불리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고 중국 세력을 물리치면서 발전해 나갔다.

3세기 동천왕 때에 고구려는 중국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위나라의 반격을 받아, 한때 수도인 국내성까지 함락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4세기 초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을 공격하여 중국 세력을 완전히 몰아 내고, 고조선의 옛 땅을 되찾았다(313). 그러나 고국원왕 때에는 서쪽으로부터 전연, 남쪽으로부터 백제의 침략을 받아 큰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에 4세기 후반 소수림왕 때에는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진과 평화적인 외교 관계를 맺고 체제 정비에 힘썼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광개토 대왕은 영토를 크게 넓혀 고구려의 전성 시대를 열었다. 그의 업적은 만주의 집안에 남아 있는 광개토 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때 고구려는 요동 지방을 포함한 만주 대부분의 땅을 차지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여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였다. 또, 5만의 군사를 신라에 보내어, 침입한 왜군을 낙동강 유역에서 물리쳤다.

확대보기
광개토 대왕릉비
광개토 대왕릉비
팝업창 닫기

광개토 대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를 견제하는 한편, 수도를 평양성으로 옮겨(427) 고구려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왕권 강화뿐만 아니라 남진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어 장수왕은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삼국 간의 항쟁에서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확대보기
고구려의 전성
고구려의 전성
팝업창 닫기

이 때의 고구려 세력은 한반도 중부 이남에까지 미쳤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원 고구려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이 무렵의 고구려는 동북 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우리 민족을 중국 세력의 침입으로부터 막아 주는 방파제의 역할을 하였다.

백제의 발전

백제는 처음 마한의 한 소국에 불과했지만, 점차 마한 세력을 통합하면서 그 중심 세력이 되었다. 백제도 고구려처럼 중국 세력의 간섭과 침략을 물리치면서 성장하였다.

3세기 고이왕 때에는 한강 유역에 있는 여러 세력을 통합하고, 안으로 국가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그 후, 4세기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 백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마한의 나머지 땅을 정복하여 남해안에까지 진출하였고, 북쪽으로는 고구려를 쳐서 고국원왕을 전사하게 하였다. 아울러 낙동강 유역에까지 진출하여 가야의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때 중국의 동진, 그리고 왜와 교섭을 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백제는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 및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해상 활동의 무대를 넓혔다.

그러나 백제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서 그 중심 지역인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주왕은 수도를 금강 유역의 웅진성으로 옮겼다(475).

그 후 백제는 한동안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중앙 귀족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러나 동성왕 때에는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고 고구려에 대항하는 한편, 신진 세력을 등용하여 귀족 간의 갈등을 수습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6세기 전반에 이르러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이 다시 회복되었다.

무령왕 때에는 왕족을 지방에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고, 고구려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펴서 국력을 점차 회복하였다.

확대보기
무령왕릉 지석(충남 공주)
무령왕릉 지석(충남 공주)
팝업창 닫기

이어 성왕은 수도를 사비성으로 옮기고, 행정 구역을 정비하면서 왕권 강화를 꾀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장려하고, 또 중국의 남조와 문물을 교류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성왕은 신라와 힘을 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잃었던 한강 유역을 한때 되찾는 등 나라의 중흥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신라의 비약

신라가 나라의 기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였다.

신라는 한때 국가의 발전을 위해 고구려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나, 눌지왕 이후부터는 백제와 동맹을 맺어(433) 고구려의 내정 간섭과 남진 정책을 견제하였고, 국력을 길러 자주적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리하여 신라는 6세기 지증왕을 거쳐 법흥왕, 진흥왕에 이르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증왕 때에는 관개⋅수리 사업과 가축을 이용한 농사 기술을 보급시켜 농업 생산력을 높였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신라’로 확정하였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고쳤다.

법흥왕 때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 삼았으며, 율령을 만들어 나라의 지배 체제를 갖추었다. 또, 김해의 금관 가야를 합쳐 낙동강 유역의 가야 지역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진흥왕 때에는 화랑도를 개편하여 국가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한편, 고구려와 가야를 공략하여 영토를 크게 넓혔다. 진흥왕은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쳐서 한강 상류 지역을 점령하고, 다시 백제가 되찾은 한강 하류 지역까지 차지하여 한강 유역을 신라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어서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장악하였고, 또 동해안을 따라 원산만 일대에까지 진출하여 동예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이 무렵에 새로이 개척한 영토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진흥왕 순수비이다.

확대보기
신라의 발전(6세기)
신라의 발전(6세기)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
단양 적성비(충북 단양)
팝업창 닫기

신라는 한강 유역의 점령을 계기로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었고, 또 중국과 직접 교류하여 국제적 지위를 높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의 경제력을 장악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게 됨에 따라 장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확대보기
삼국의 세력 확장
삼국의 세력 확장
팝업창 닫기

도움글

* 삼국과 한강 유역

한강 유역은 농경에 적합하고, 여러 지역의 문화가 합쳐지며, 또 중국과 교류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삼국은 안으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밖으로 영토 확장을 위한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한강 유역을 다투어 차지하려 하였다.

한강을 중심으로 발전한 백제는 황해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면서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 후 백제는 고구려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점차 쇠퇴하였다.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번영을 누렸으나,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김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권을 잃었다.

신라는 진흥왕 때에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연결을 끊었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개척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인적⋅물적 자원이 크게 증가하게 되었고, 황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문호를 열게 되었으며, 이에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학습 정리

1. 고구려는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때에 만주의 대부분과 한반도의 중부 이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2. 백제는 근초고왕 때 중국의 요서, 산둥 지방 및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진출하는 등 해상 세력을 형성하였다.

3. 한강 유역은 평야가 넓고, 육상⋅수상 교통이 편리하며, 인구가 많아 국력 증강에 크게 이로웠으므로 삼국이 서로 차지하려 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