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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의 재통일

학습 개요

통일 신라는 8세기 후반에 진골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다툼, 6두품 세력의 정치적 불만 등이 커지면서 골품 제도가 흔들리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나라의 행정 체계가 흐트러지고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각처에서 호족 세력과 해상 세력들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함으로써 신라는 분열되고 말았다.

또, 신라 말에는 종교계에도 큰 변화가 나타나 새로운 불교의 종파인 선종이 널리 보급되고, 유교, 도교, 풍수 지리설까지 성행하였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한편,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는 민생의 안정을 꾀하는 동시에, 민족 융합 정책, 숭불 정책,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왕권의 기반을 굳건히 다져 나갔다.

학습 문제

1. 신라 말기에 어떤 세력이 사회 변화를 앞장 서서 이끌었는가?

2. 신라 말기의 사상계에 나타난 새로운 동향은 어떠하였는가?

3.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4. 고려 태조는 민족의 재통일을 위하여 어떠한 정책을 추진하였는가?

신라 사회의 동요

통일 후 번영을 계속하던 신라는 8세기 후반부터 귀족들의 반란과 왕위 다툼이 거듭 일어나 왕권은 흔들리게 되었고, 귀족 세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으로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혼란은 혜공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진골 귀족이 가담한 싸움은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선덕왕 때부터 무열왕계가 끊어지고, 방계 귀족들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부터 신라에서는 왕위 다툼이 심해져서 150여 년 동안에 20여 명의 왕이 바뀌는 큰 혼란을 겪으면서 왕권은 크게 약화되어 갔다. 헌덕왕 때에 일어난 김헌창의 난이 그 대표적인 것인데, 이후 귀족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해졌다. 격심한 왕위 다툼은 신라의 전통적 신분 질서인 골품제를 동요시켜 사회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진골 위주의 사회 체제에 특히 반발을 보인 계층은 6두품 세력이었다. 6두품은 관직 승진에 제한을 받았기 때문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국학에 들어가 배우기도 하고, 당에 유학을 갔다 오거나 승려가 되어 새로운 활로를 찾으면서 골품제의 모순을 앞장 서서 비판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새로운 정치 감각을 가지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추구하였다.

지방 세력의 대두

신라 사회가 혼란에 빠지면서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각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세력을 가지고 진골 귀족 중심의 사회에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지방 세력이 나타나게 되었다.

신라 말의 지방 세력에는 촌주 등과 같은 토착적인 세력이 많았고, 이 밖에 중앙에서 지방에 내려간 귀족 출신도 있었다. 이들 중에서도 성주 또는 장군이라 불리는 호족이 가장 큰 세력이었다.

이들은 많은 사병과 큰 농장을 가지고 농민을 지배하면서,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또, 이들 호족은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과 결탁하면서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웃의 다른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세력을 넓혀 나갔다.

또하나의 중요한 지방 세력으로는 해상 세력을 들 수 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해외 무역으로 세력을 길러 왕위 다툼에까지 관여하였다.

한편, 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후반 진성 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하였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으며, 이에 따라 재정이 궁핍해지고 지방에 대한 명령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과 전염병으로 인해 가뜩이나 궁핍해진 농민들에게 세금을 심하게 독촉하자, 각처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거나 도적 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상주 지방의 원종과 애노를 비롯하여 북원의 양길, 완산의 견훤 등이 잇따라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사상계의 변화

신라 말 사상계의 큰 변화는 새로운 불교 종파인 선종의 등장이었다. 이 때 교종은 교리와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운 데 반하여, 선종은 교리보다도 정신 수양을 통한 해탈을 강조하였다. 선종은 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크게 발전하여 선종 9산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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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교 9산
5교 9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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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시기에는 도선에 의하여 풍수 지리설이 널리 보급되었고, 유학자들도 선종과 풍수 지리설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신라 말에는 선종, 유교, 풍수 지리설이 서로 결합되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상계의 변화는 중앙의 6두품 세력과 지방의 호족 세력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후삼국의 성립

신라 말에 이르러 골품제의 모순으로 귀족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고, 이러한 분열은 결국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이에 따라 지방 호족 세력의 대두와 농민의 봉기가 잇따랐다. 지방의 호족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서로 연합하면서 그 세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 가운데 세력을 모아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사람은 견훤과 궁예였다.

견훤은 본래 상주 지방 농민의 아들로서, 신라군에 들어가 서남해 방면에서 활약하다가,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자 지금의 광주인 무진주를 점령하고, 이어서 완산주에 도읍하여 후백제를 세웠다(900). 그는 전라도와 충청도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남중국의 오월, 일본과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리고 경주에까지 쳐들어가는 등 신라에 압박을 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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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산성(경북 상주)
견훤 산성(경북 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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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신라의 왕족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 궁예는 한때 양길의 부하였으나, 힘을 길러 그를 넘어뜨린 다음, 송악을 근거로 후고구려를 세웠다(901). 후에 그는 국호를 태봉으로 고치고 수도를 철원으로 옮겨 나라의 기틀을 갖추어 갔다.

태봉은 강원, 경기, 황해도 일대까지 영역을 넓혀 그 세력을 떨쳤다. 궁예도 중국과 친선 관계를 맺으면서 신라를 침략하였고, 전라도의 나주 지방을 점령하여 후백제를 견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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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의 형세
후삼국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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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건국과 민족의 재통일

송악의 호족인 왕건은 해상 세력을 배경으로 성장하였으며, 일찍부터 궁예 밑에서 활약하였다. 그는 수군을 이끌고 나주 지역을 공략하여 후백제를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 전공으로 궁예의 신임을 얻어 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이 때, 궁예는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포악한 정치를 일삼다가 민심을 잃고 있었다. 이에 왕건은 궁예를 몰아 내고 새 왕조를 일으켰다(918). 왕건은 국호를 고려, 연호를 천수라 하고,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겼으며, 고구려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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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도
송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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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후삼국을 통일하고자 후백제를 공격하는 한편, 신라에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썼다. 처음에는 전세가 고려에 불리하였으나, 점차 세력을 만회하면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여 승리를 굳혔다.

고려의 왕건은 견훤이나 궁예와는 달리 확고한 토착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군대의 규율이 엄격하여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므로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다른 호족들을 포섭하여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이 무렵, 신라는 세력이 더욱 약해져서 겨우 경주 일대를 지배할 따름이었다. 더구나, 견훤의 경주 침입으로 쇠약해진 신라는 더 이상 국가를 보전할 수 없어서 마침내 나라를 고려에 넘기고 말았다(935).

이 무렵, 후백제에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크게 내분이 일어났다. 견훤의 큰 아들인 신검이 견훤을 금산사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고려는 이 틈을 타서 후백제를 쳐 무너뜨렸다(936). 이로써 반세기에 걸친 분열이 수습되고, 민족의 재통일이 이룩되었다.

태조의 정책

태조는 새 왕조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후삼국 이래로 무질서해진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조세를 비롯한 여러 가지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고자 노력하였다.

둘째, 북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하에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려 하였다. 태조는 평양을 중시하여 서경이라 하고, 이 곳을 북방 개척의 기지로 삼았다. 그리하여 태조 말년에는 북으로 청천강과 영흥 지방까지 영토를 넓힐 수 있었다.

셋째, 민족 융합 정책을 폈다. 태조가 비록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였지만, 각 지방에는 여전히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태조는 여러 호족들과 혼인 관계를 맺고, 왕씨 성을 내리기도 하여 이들을 회유하였다. 또, 태조는 발해 유민을 포섭하여 민족 화합에 힘썼다.

넷째, 불교를 숭상하였다. 신라 이래로 백성들은 불교를 널리 믿어 왔는데, 태조는 특히 부처의 도움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고 하여 정책적으로 불교를 널리 장려하였다.

왕권의 강화

태조의 뒤를 이어 혜종이 즉위하자, 여러 왕자와 외척들 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싸움이 벌어졌다. 이에 정종은 왕권에 위협적인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힘쓰는 한편,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정종이 갑자기 병으로 죽음으로써 서경 천도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고려 초 왕권 강화에 획기적인 기반을 닦은 것은 광종이었다. 광종은 먼저 노비 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던 많은 노비를 해방시킴으로써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또,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유교의 학식과 능력에 따라 인재를 채용하고 이들을 국왕에 충성하는 관료로 삼았다. 그리고 광종은, 이러한 왕권 강화책에 대하여 공신, 호족들의 불만이 커지자, 이들을 단호하게 숙청하였다. 그리하여 호족들의 세력이 꺾이고 왕권이 안정되었다.

도움글

* 호족 세력의 등장

신라 말기의 사회 모순에 항거하여, 지방에서 일어난 세력 중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지방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각 지방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호족들은 낙향한 중앙 귀족, 지방관, 해상 세력, 군진 세력, 촌주, 초적 등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촌락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던 촌주는 일반 농민보다 많은 토지와 소, 말을 소유하여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중앙 정부의 착취에 시달려 유랑하는 농민들을 끌어들여 농장을 경영하고 이들을 사병으로 삼기도 하였다.

신라 말에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각지에서 초적이 봉기하게 되자, 이들은 촌락민을 동원하여 촌락 주위에 성을 쌓고 무장 자위 조직을 갖추었다. 이들은 성주나 장군으로 자칭하고 농민이나 초적은 물론 6두품의 지식인과 선종의 승려를 끌어들이면서 통치력도 길러 나갔다. 그 중에서 세력이 강한 자는 주위의 촌락들을 복속시키면서 더욱 세력을 확대하여 대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학습 정리

1. 신라 말기에 사회적 변화를 앞장 서서 이끌었던 세력은 지방의 호족과 중앙의 6두품 세력이었다.

2. 신라 말기에는 선종이 호족의 후원을 받으면서 유행하였고, 유교, 풍수 지리 사상과 결합하여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3. 태조 왕건은 애민 정책으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 세력을 널리 포섭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4. 태조 왕건은 민족 융합 정책과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발해의 유민까지 포섭하여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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