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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귀족 문화의 발달

학습 개요

신라 말에 선종이 널리 보급되면서 고려 초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의천은 교종과 선종을 조화시키려는 통합 운동을 일으켰다. 한편,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불교 사상의 정리를 위해 대장경의 조판이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유교는 국가의 정치 이념으로 확립되어 교육과 과거에서도 중시되었다. 이 밖에 풍수 지리설과 도참설도 정치와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향가가 쇠퇴하고 한문학이 발전하였다. 역사서로는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가 유명하다. 귀족 사회가 발전하면서 귀족들의 생활과 관련된 예술 분야가 특히 발달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 전기에 불교가 융성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며, 불교의 통합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2. 유교, 불교, 풍수 도참 사상은 고려 사회에 각각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3. 고려 전기 문화의 특색은 무엇인가?

불교의 발달

불교는 고려 초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크게 발달하였다. 태조 이래 개경에는 10개의 큰 사원이 세워지고, 그 후 문종 때에는 2800칸이 넘는 흥왕사가 건립되어 불교 왕국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과거 제도에서는 관리를 선발하는 문과와 함께 승려들에게 법계를 주는 승과가 마련되었다. 명망이 높은 승려는 국사나 왕사의 높은 지위에 올라 국왕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에는 일반 민중은 물론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도 승려가 되고자 하였다.

고려 초기의 불교계는 교종과 선종이 대립 상태에 있었다. 광종은 왕권의 안정을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면서, 분열된 불교 교단을 통합하려 하였다. 불교계의 통합 운동은 대각국사 의천에 이르러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

문종의 아들인 의천은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는데, 불교의 여러 경전은 물론 유교의 경전까지도 정통할 정도였다. 그는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연구하고 돌아와, 먼저 교종의 여러 종파를 종합하고, 또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여 이를 중심으로 교종과 대립하고 있던 선종을 융합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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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대각국사 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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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경의 조판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대장경이 여러 차례 조판되었다. 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총칭하는 말인데, 불교를 숭상한 고려는 국가적인 사업으로 대장경의 조판 사업을 추진하였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게 되자, 부처의 힘을 빌려 적을 막고자 하는 염원에서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이를 초조 대장경이라 한다. 그 후, 의천이 송, 요, 일본 등지에서 구해 온 불교 서적들을 모아 초조 대장경을 보완하여 속장경을 조판하였다. 이들 판목은 대구 부인사에 보존되어 있었으나,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그러나 그 판본의 일부가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하게 한다.

유학의 발달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은 것은 성종 때의 일이었다. 당시에 최승로는, 불교는 내세의 복을 비는 종교이기 때문에 현세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유교는 정치 사상으로 채택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학이 발달함에 따라 관학은 물론 사학의 설립도 활발하였다. 당시의 사립 학교로는 해동 공자라고 불린 최충이 세운 문헌공도를 비롯하여 12개의 학교가 있어서 이를 12도라 불렀다. 사학은 나라에서 세운 국자감보다 수준 높은 교육을 하였다.

사학이 발달하자 상대적으로 국자감이 쇠퇴하였다. 이에 예종 때에는 국자감을 육성하기 위하여 7재라는 전문 강좌를 두어 관학의 진흥을 꾀하고, 양현고라는 장학 기금도 마련하였다.

한편, 궁궐 안에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학문 연구소를 설치하여 유학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국왕은 학자들의 강의를 듣고, 학자들과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풍수 지리설과 도참설

풍수 지리설은 산세나 지형이 인간의 길흉 화복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신라 말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고려 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서경은 풍수 지리설에 의하면 지맥의 근본이 된다고 하여 뒤에 묘청에 의해 서경 천도 운동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편, 도참 사상도 유행하였는데, 이는 길흉 화복을 예언이나 징조를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으로, 신비적, 미신적 성격이 짙었다. 이것은 풍수 지리설과 결부되어 풍수 도참 사상으로 발전하여, 정치, 사회는 물론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풍수 도참 사상은 특히 도읍지나 궁궐 터와 같은 중요한 터를 정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문학과 역사학

문학에서는 신라 시대부터 내려오던 향가가 점차 쇠퇴하고, 그 대신 한문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고려 초기까지는 향가가 이어져서 균여 대사가 지은 향가 11수가 전하고 있다. 한문학이 발달함에 따라 뛰어난 시인, 문장가가 나타났고, 문신 월과법이라 하여 달마다 시를 지어 국왕에게 바치도록 하는 제도도 있었다.

한편, 고려 시대에도 일찍부터 국가에서 역사서를 편찬하였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으로 역사 기록이 많이 없어지자, 태조로부터 목종 때까지의 7대에 걸친 왕조 실록을 편찬하였으나,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지금까지 전해 오는 가장 오랜 역사서는 인종 때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이다. 삼국사기는 유교 사관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역사서로, 후에 나온 삼국유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삼국사기는 사대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는 비판도 있으나, 김부식은 이 책의 서문에서 당시 고려의 귀족 관리들이 중국의 역사에는 정통하면서도 우리 나라의 역사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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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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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발달

귀족 사회가 발전하고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귀족의 취향을 반영한 예술과 불교 예술이 크게 발달하였다.

고려의 예술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청자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고려 사람들의 예술적 재능과 창의력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청자의 뛰어난 점은 형태가 지니는 선의 흐름, 아름다운 색깔, 그리고 상감법에 있다.

청자의 형태는 병, 항아리, 주전자, 접시, 필통, 향로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색깔은 황록색, 황갈색의 것도 있으나, 비색으로 된 것이 가장 아름답다. 무늬는 양각이나 음각으로 새겼으나, 뒤에 이르러서는 상감법을 써서 고려인의 독특한 솜씨를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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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자
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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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으로는 관촉사의 석조 미륵 보살 입상과 부석사의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불상은 공예 분야와는 달리, 통일 신라 시대에 비하여 예술적 솜씨가 뒤떨어졌다.

석탑으로는 현화사의 7층 석탑과 월정사의 팔각 9층 석탑이 유명하고, 부도로는 정토사의 홍법국사 실상탑과 법천사의 지광국사 현묘탑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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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 팔각 9층 석탑(강원 평창)
월정사 팔각 9층 석탑(강원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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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서울 경복궁)
정토사 홍법국사 실상탑(서울 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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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에서는 일찍부터 궁중에 도화원을 두어 화가를 양성하였다. 인종 때의 이령은 예성강도를 그려 송나라 휘종의 찬사를 받았고, 그의 아들 이광필은 산수화를 잘 그렸다.

글씨로는 유신, 탄연이 특히 능하여 고려 후기의 최우, 신라의 김생과 함께 신품 4현으로 손꼽히고 있다.

도움글

* 고려 청자

고려 청자는 중국 송대의 청자 제작 기술이 전해져 더욱 발전한 것이다. 아무런 장식이 없이 푸른 빛깔을 띤 고려 청자는 식물이나 동물의 모양을 본뜬 것과 중국 옛 청동기의 모양을 본뜬 것 등 모양이 다양하였다.

인종 무렵부터는 점차 고려의 독자적인 기법과 독특한 빛깔의 상감 청자가 개발되었다. 상감 청자에서 사용된 상감 기법은 그릇 바탕에 칼로 무늬를 파내고, 이 음각 무늬에 흰 흙이나 붉은 흙을 메워 유약을 발라 구워 내는 것으로, 불에 구우면 흰 흙은 흰색으로, 붉은 흙은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무늬를 더욱 아름답게 하였다.

상감 기법은 이미 예부터 사용되던 것으로, 금속의 표면에 무늬를 파고 은이나 금을 넣어 장식하는 은입사 기법이나 나무 표면을 파내고 그 곳에 자개를 장식하여 옻칠을 하는 나전 칠기 기법 등을 청자에 적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청자에 무늬를 넣는 상감 기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고려의 독창적인 기술이었다. 또, 세계에서 최초로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를 사용하여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기법도 창안하여 사용하였다.

중국 청자가 색이 진하고 유약이 불투명하여 무거운 느낌을 주는 데 비하여, 고려 청자는 은은하면서도 맑은 비색의 빛깔과 운치가 있는 상감 무늬 등이 그 특색이었다. 고려 청자의 생산지로는 강진, 부안, 송화, 강화 등이 유명하였다.

학습 정리

1.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후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고,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성립되어 교⋅선 양종의 통합이 추구되었다.

2. 고려 시대의 유교는 정치 사상으로 자리잡았고, 불교는 신앙 생활을 주도하였으며, 풍수 도참 사상도 정치⋅사회 생활에 영향을 끼쳤다.

3. 고려 전기의 문화는 귀족 생활과 불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발전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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