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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Ⅵ. 북방 민족과의 전쟁
  • 2. 몽고와의 전쟁

2. 몽고와의 전쟁

학습 개요

최씨 무신 정권 시대에 몽고족은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그 세력을 확장하여 제국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중국을 위협하더니 고려에까지 쳐들어왔다. 이에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40여 년 간 끈질기게 항전하였다. 특히, 농민과 천민들이 용감히 싸워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고려 정부는 몽고와 강화를 맺었다. 이에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몽고에 대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의 항쟁은 비록 실패하였으나, 고려인의 자주성과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학습 문제

1. 몽고의 침입에 대하여 고려는 어떻게 항쟁하였는가?

2. 삼별초는 어떻게 몽고에 대항하여 싸웠는가?

3. 몽고와 강화한 후 고려는 몽고로부터 어떠한 간섭을 받았는가?

고려와 몽고의 접촉

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제국을 건설하였다. 이 때, 만주에 살고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고려에 침입해 왔다. 몽고군에 쫓긴 이들은 서북 지방의 강동성에 몰려 있었다. 고려는 몽고와 함께 이를 소탕하였는데, 이것이 고려가 몽고와 접촉한 최초의 일이다. 그러나 몽고는 이를 빌미로 하여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여 왔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몽고와의 전쟁

고려에서 공물을 가지고 돌아가던 몽고의 사신이 국경 부근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는 이것을 구실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다. 귀주에서 박서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몽고군은 길을 바꾸어 남하하여 개경을 포위하였다.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고려는 일단 몽고와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군은 각지에 감시관인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이후, 몽고가 고려에 대하여 더욱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고 심하게 간섭을 해 오자, 당시의 집권자인 최우는 단호히 항전할 것을 결의하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대몽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이에 몽고는 재차 침입하여 왔으나, 몽고의 장군 살리타가 처인성에서 김윤후 부대의 화살에 맞아 죽자 그들은 군대를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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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인성 터(경기 용인)
처인성 터(경기 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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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도 몽고군은 화의가 맺어질 때까지 여러 차례 침입해 왔다. 그러나 고려는 끈질긴 항쟁을 계속하면서 나라를 지켰다. 강력한 반몽 정책을 취한 최씨 정권이 강화도에서 꿋꿋이 항전을 지휘하였고, 육지에서는 일반 민중이 몽고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특히, 정부에서는 장기전에 대비하여 농민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옮겨 농사를 지으면서 항전하도록 하였다.

민중의 항전은 몽고의 침략을 물리치는 바탕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까지도 용감히 싸워 여러 곳에서 전공을 세웠다. 특히, 몽고군이 충주성에 쳐들어왔을 때에 지광수 등은 끝까지 성을 지켰다. 한편,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대장경을 조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몽고와의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또 몽고에 잡혀간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경주 황룡사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대장경 판목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

삼별초의 항쟁

전쟁이 오래 계속되자,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화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기간에 걸친 항전으로 국력의 소모도 컸고, 항전을 고수해 오던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1258), 고려는 몽고와 화의를 맺게 되었다.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된 후에 무신 정권이 몰락하자, 왕정이 회복되고 뒤이어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때, 개경으로 환도하는 것은 곧 몽고(원)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하여,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는 정부의 환도에 반대하고 대몽 항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강화도에서 멀리 진도로 내려가 여⋅몽 연합군과 싸웠다. 진도가 함락되자, 그 일부는 다시 제주도로 옮겨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결국 여⋅몽 연합군에 의해서 평정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 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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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 애월)
삼별초의 항몽 순의비(제주 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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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의 관계

고려는 원과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곧 새로운 시련에 부딪히게 되었다. 원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함의 건조, 군량의 공급, 군사의 동원을 고려에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단행되었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원은 일본 정벌을 위하여 고려에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다. 정동행성은 일본 원정이 실패한 뒤에는 원과 고려와의 공적 연락 기관으로 운영되었다.

원은 화주에 쌍성 총관부, 서경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 총관부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관할하였다. 동녕부와 탐라 총관부가 관할하던 영역은 곧 회복되었으나, 쌍성 총관부가 관할하던 지역은 공민왕이 무력으로 탈환할 때까지 원의 지배하에 있었다.

또,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관제와 왕실에서 쓰는 용어도 격을 낮추게 되었고, 원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금, 은, 매 등 공물을 요구하여 고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되었다. 따라서, 농민들은 일반 조세 외에 원에 대한 공물도 내게 되어 그 부담이 가중되었다.

한편, 양국인의 왕래에 따라 문물이 교류되어, 고려의 상류 계층에서는 몽고어와 몽고식 의복 등의 몽고풍이 유행하였으며, 원에서도 고려양이라 하여 고려식 생활 풍습이 유행하였다.

도움글

* 몽고풍과 고려양

고려 후기에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짐에 따라 몽고의 여러 가지 풍속이 고려에 들어와 유행하였는데, 이를 몽고풍이라 하였다. 몽고의 풍속은 주로 왕실이나 귀족, 관리 등 상류층을 중심으로 유행하였고, 그 일부는 민간에까지 파급되어 우리 풍속에 영향을 주었다.

변발과 호복은 당시 왕실이나 관리들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대표적인 몽고 풍속이었다. 여자의 족두리, 신부의 얼굴에 찍는 연지, 남녀의 옷고름에 차는 장도 등의 몽고 풍속은 일반 민간에 널리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밖에 우리말 가운데 장사치 등과 같이 아치 또는 치가 붙는 말이나 임금의 진지상을 뜻하는 수라라는 말 등도 몽고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편, 고려의 풍속도 몽고에 흘러들어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고려양이라 하였다. 원 왕실과 귀족들은 후궁, 궁녀, 시녀 등에 충당하기 위해 자주 고려의 처녀들을 데려갔고, 또 많은 고려인들이 전쟁 포로로 원에 붙잡혀 갔다. 바로 이들에 의해 고려의 풍속이 원의 왕실과 일반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특히, 고려의 풍속 가운데 의복, 신발, 모자와 만두, 떡 등의 음식이 몽고 사회에 급속히 전파되었는데, 고려 만두, 고려 떡 등의 용어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학습 정리

1. 농민과 천민의 저항 의지는 외적의 침입에 대항하는 애국심으로 승화되어 몽고와 끈질기게 싸울 수 있었다.

2. 삼별초는 정부가 몽고와 강화한 후에도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겨 가며 최후까지 몽고와 싸웠다.

3. 고려는 몽고와 강화한 후 일본 원정에 협력을 강요당하고 일부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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