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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 후기의 문화

학습 개요

고려 후기의 문화에서는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불교계는 선종을 중심으로 융합되어 조계종이 성립되었으며, 원으로부터 새롭게 수용된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끄는 사상으로 자리잡아 갔다.

문학에서는 자주 의식이 강한 작품들이 창작되었고, 귀족이나 민중의 삶을 노래한 작품도 나타났다. 역사에서는 민족의 자주 의식을 강하게 드러내는 역사서가 나와 민족의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었다.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발명하여 우리 민족의 슬기를 보여 주었으며, 밖으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여 이것을 실제 생활에 활용하였다.

학습 문제

1. 고려 후기의 불교와 유학에서는 어떠한 변화가 나타났는가?

2. 고려 후기의 문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나타난 특징은 무엇인가?

3. 고려 후기의 과학 기술은 어떤 분야가 발전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세계적 자랑거리는 무엇인가?

불교계의 변화

무신 정변 이후, 고려의 불교계에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문신 귀족들의 보호를 받아 왔던 교종이 쇠퇴하고, 그 동안 침체해 있던 선종이 조계종으로 통합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다.

조계종의 교세를 크게 떨친 이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그는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불교 이론을 세워 선종 중심의 불교 혁신 운동을 전개하였다. 지눌은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수행을 계속하여야 하며, 부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참선은 물론 불경을 익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처럼 지눌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융합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조계종이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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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광사(전남 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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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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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려는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강화도에서 항전하면서 팔만 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이것은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려는 굳은 신앙심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의 무신 정권은 이것을 구심점으로 삼아 백성들의 단합을 꾀하였다. 오랜 전란 속에서도 세계 불교사에서 유례가 없는 우수한 대장경을 조판한 것은 불교의 높은 수준과 함께 왕성한 민족 의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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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 대장경판(경남 합천 해인사)
팔만 대장경판(경남 합천 해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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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고려 후기에 이르러 사원은 권문 세족의 후원을 받아 넓은 농장을 차지하고, 고리대업이나 장사를 하여 재산을 축적하는 등의 비행으로 인하여 사회의 강한 비난을 받았다. 이리하여 불교는 고려 말의 어지러운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을 잃고 말았다.

성리학의 수용

무신 정권 때 큰 타격을 받은 유학은 충렬왕 때에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그 뒤, 충선왕은 원의 수도에 만권당을 세우고, 고려와 원의 학자들을 교류하게 하여 고려의 유학을 발전시켰다.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유학의 발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대성한 것으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심성 문제를 밝히려는 유학이었다.

성리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이는 충렬왕 때의 안향이었다. 그 후 백이정이 직접 원에 가서 배워 와 이제현 등에 전수하였고, 이색, 정몽주, 길재 등이 이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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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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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을 받아들이자, 사상계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고려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하고, 불교를 신앙으로 삼아 두 사상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불교를 비판하였다. 처음에는 사원의 폐단과 승려들의 비행을 공격하였으나, 정도전 등은 불교가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불교 자체를 공박하였다. 그리하여 일상 생활에서 불교 의식 대신 주자가례에 의한 예속을 장려하였다.

문학과 역사학

고려 후기에는 문학에서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문학을 주도한 계층은 사대부들이었다.

전통적인 향가 형식을 계승하고 사대부 계층의 생활상을 반영한 작품으로 한림별곡, 관동별곡 등이 있으며, 새로운 시가 문학으로서 사대부들의 한적한 전원 생활을 나타낸 작품으로 어부가가 있다.

장가라고 불리는 민중의 노래도 유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청산별곡은 토속적이고 민중적인 감정을 읊어 우리 나라 시가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한문학에서는 이인로의 파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과 같은 수필 문학이 발달하였다. 한시도 발달하여 이인로, 이규보 등이 유명하였다. 이규보는 고구려의 건국을 노래한 동명왕편에서,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체를 구사함으로써 새로운 문학 세계를 추구하였다.

역사에 관한 저술로는 삼국유사가 가장 유명하다. 승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는 불교의 역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설화 등이 많이 수록되어 있고,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자주 의식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고대사에 관한 귀중한 내용이 실려 있다. 이는 몽고의 침략으로 쓰라린 시련을 겪고 있던 우리 민족에게 자각과 자부심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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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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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 이승휴의 제왕운기와 각훈의 해동고승전도 남아 있어, 역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금속 활자와 화약

고려에서는 여러 차례 대장경을 새기는 등 목판 인쇄술이 발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금속 활자가 발명되어 활판 인쇄술도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때에 금속 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라는 책을 간행하였는데(1234), 이는 서양보다 200여 년이나 앞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1377년에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은 금속 활자로 인쇄된 책 중에서 지금까지 남아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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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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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는 화약 제조법도 개발되었다. 화약 만드는 법을 배워 이를 발전시킨 최무선은 화통도감의 설치를 건의하고, 거기에서 화약과 각종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무찌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화약은 우리 나라의 무기 제조 기술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또, 고려는 원과 문화를 교류하는 과정에서 천문, 수학, 의학 등 발달된 아라비아 문화를 받아들였다. 아라비아 문화는 고려의 과학 기술 발달에 큰 영향을 주어 천문학과 의학 기술을 크게 향상시켰다.

목화의 전래

고려 시대에는 벼농사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수리 시설이 많이 확충되었으며, 이에 따라 농업 생산력이 높아졌다. 또, 원의 농서인 농상집요를 받아들여 농업 기술도 개량하였다.

특히, 고려 말에는 목화를 심어 우리 나라 의복 재료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 목화의 재배는 공민왕 때에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이 목화씨를 가져온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무명은 중요한 옷감으로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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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문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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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시배지(경남 산청)
목화 시배지(경남 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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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목조 건물로는 봉정사의 극락전,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조사당, 수덕사의 대웅전 등이 유명하다. 이들 건물의 기둥은 가운데를 불룩하게 만들어 안정감을 준 배흘림(엔타시스)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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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경북 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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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으로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경천사 10층 석탑이 유명하다.

그림으로는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와 혜허가 그린 양류 관음도가 유명하다. 글씨로는 신품 4현의 한 사람인 최우가 뛰어났고, 서체로는 전기에 유행한 구양순체와 왕희지체 대신에 조맹부체가 유행하였다.

음악에는 우리 나라의 전통 음악인 향악과 중국 음악인 당악이 있었으며, 송에서 대성악이 수입되어 궁중 음악으로 발달하였다. 향악곡으로는 동동, 대동강 등이 있었다. 이와 함께 산대놀이라는 가면극도 유행하였다.

도움글

* 팔만 대장경

팔만 대장경은 최씨 정권이 부처의 힘을 빌려 몽고의 침략을 격퇴하고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고종 때에 시작된 대장경의 조판은 16년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모두 81,258장의 경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팔만 대장경’이라고도 하고, 강화도에 있다가 조선 태조 이후 해인사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해인사 대장경’이라고도 한다.

대장경판의 크기는 가로 72.6cm, 세로 26.4cm, 두께 3cm이다. 목재는 남부 지방에서 많이 나는 박나무와 자작나무를 사용하였다. 판목이 뒤틀리거나 벌레가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소금물에 쪄서 진을 뺀 다음 그늘에 말렸다.

글자를 쓴 종이를 판목에 뒤집어 붙이고 글자를 새겼는데, 판목의 앞뒷면에 대개 1줄에 14자씩 23줄을 새겼다. 글자가 새겨진 판목에 옻칠을 하고 네 귀퉁이에 청동 마구리를 대어, 판면의 손상과 뒤틀림을 막고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팔만 대장경은 이처럼 정성들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7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팔만 대장경은 5천만 자 이상의 글자를 8만여 장의 경판에 새긴 것이다. 그런데 새긴 글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틀린 글자가 거의 없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새길 때마다 절을 했다고 하니 글자를 새기는 데 온갖 정성을 쏟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팔만 대장경은 그 내용이 정확하고 완벽할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대장경에는 보이지 않는 경전들까지도 수록하고 있어 우리 민족의 소중한 문화 유산이다.

학습 정리

1. 고려 후기에는 조계종이 지눌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고, 성리학이 불교를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사상이 되었다.

2. 고려 후기에는 민중의 감정을 읊은 시가 문학이 대두하였으며, 민족 의식을 일깨워 주는 역사서도 편찬되었다.

3. 고려 후기에는 인쇄술과 화약, 무기 제조술 등의 과학 기술이 발달하였으며, 팔만 대장경의 조판과 금속 활자의 발명은 우리 민족의 세계적인 자랑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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