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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 국토의 확장

4. 국토의 확장

학습 개요

조선의 주변에는 명, 여진족, 일본이 있었다. 조선은 명에 대하여 정치적으로 그들의 명분을 살려 주고,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국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경제적, 문화적으로 실리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북쪽의 여진족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세종은 적극적인 정책을 써서 여진족을 토벌하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출하여 조선 왕조의 영역으로 확정하였다.

일본에 대해서도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고려 말에 심하였던 왜구의 침략이 조선 초기에까지 계속되자, 조선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여 다시는 약탈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3포를 개항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하였다.

학습 문제

1. 조선은 명에 대한 외교를 어떠한 방향으로 추진하였는가?

2. 조선이 일본과 여진족에 대하여 취한 외교 정책은 어떠하였는가?

3. 4군과 6진의 설치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가?

명과의 관계

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고, 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요동 지방의 영토 문제로 양국 간의 관계가 불편한 때도 있었다.

요동 지방은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영토이었으므로 이를 수복하기 위한 노력을 꾀하였다. 특히, 정도전 등은 요동 수복 계획을 세우고 추진하였다. 그러나 태종 때에는 요동 수복 계획을 보류하고 여진족 토벌에 힘을 썼다. 이에 양국 관계가 호전되고, 양국은 우호 친선 관계를 유지하였다. 명과의 외교는 조선측에서 더 적극적이었다. 조선은 조공을 통하여 명의 명분을 살려 주면서, 사신의 왕래를 통하여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지나친 친명 정책으로 흐르는 경향이 나타났다.

여진, 일본과의 관계

조선은 여진 및 일본에 대해서 교린 정책을 추구하면서 강경책과 회유책을 함께 썼다.

여진족은 일찍이 만주 일대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조선에서는 귀순하는 여진족에게 벼슬도 내리고, 또 생활을 보장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강경책을 써서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크게 소란을 피웠던 왜구는 조선 초기에도 우리 해안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이에, 세종 때 이종무 등이 200여 척의 함대를 이끌고 왜구 토벌에 나서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일본 정부나 쓰시마 도주가 경제적, 문화적 욕구에서 조선과 다시 무역하기를 간청해 왔다. 또, 조선에서도 왜구의 침략을 막아야 했으므로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가하고, 3포를 개항하였다. 3포는 부산포, 제포, 염포이다. 그 후, 이 곳에서 일본인들이 약속 사항을 잘 지키지 않아, 조선 정부는 일본인들의 무역 활동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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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왼쪽부터 부산포, 제포, 염포)
3포(왼쪽부터 부산포, 제포, 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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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과 6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국토를 확장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보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을 펴, 최윤덕 등은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4군을 설치하였고, 김종서 등은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물리치고 6진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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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군과 6진
4군과 6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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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조선의 국토가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확장되었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북쪽 지방에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남쪽 지방의 사람들을 이주시켜 우리 민족의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도움글

* 6진의 개척

세종 때 동북 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 남안의 종성, 온성, 회령, 부령, 경원, 경흥 등에 6개의 진을 설치하였다.

동북 방면에 대한 진출은 공민왕 5년의 쌍성 총관부 회복에 이어 고려 말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삭방도 만호 겸 병마사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이성계도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웠다. 그 결과 조선 건국 초의 영역은 대체로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경원과 경성에 무역소를 두고 여진족에게 교역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경원을 중심으로 여진족의 침략이 잦아지게 되자, 세종 때에는 “조종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는 적극적인 북진책으로 동북 지방의 개척에 착수하였다.

그 후 세종은 김종서 등을 보내어 과감하게 북방 개척을 추진하였다. 10여 년 간에 걸쳐 이루어진 6진의 개척은 서북 방면의 4군 설치와 함께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이로써 조선의 북방 영토는 두만강, 압록강 연안까지 뻗치게 되었다.

학습 정리

1. 조선은 명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여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 경제적, 문화적 실리를 취하는 외교 활동을 폈다.

2. 조선은 일본과 여진에 대해서는 교린 정책을 써서 무역을 허용하였으나, 때로는 정벌을 단행하여 침입에 대처하기도 하였다.

3. 세종 때 압록강,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 내고 4군과 6진을 설치하였는데, 이로써 국토가 확장되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국경선이 정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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