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6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6차(하)
  • Ⅰ. 실학의 발달
  • 1. 제도의 개혁

1. 제도의 개혁

학습 개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양반 사회가 안고 있던 폐단이 크게 드러나자, 위정자들은 이를 시정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우선 농민의 부담을 덜어 주기 위하여 전세를 가볍게 하고, 공납과 군역 제도를 고쳤다. 또,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하였으며,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하여 국방력의 강화에 노력하였다.

이어서, 영조와 정조 때에는 붕당 정치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하여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로 영조와 정조 때에는 어느 정도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문물 제도가 새롭게 정비되었다.

학습 문제

1. 조선 후기에 군사 제도는 어떻게 개편되었는가?

2. 정부가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을 실시한 목적은 무엇인가?

3. 탕평책이 실시될 당시의 정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비변사

16세기 중엽 이래로 계속되어 온 지배 체제의 동요는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한층 더 심해 갔다. 이에, 정부는 정치, 군사, 경제 등 여러 면에서 개혁을 추진하여 지배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 하였다. 비변사의 기능을 강화한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였다.

비변사는 본래 비상시의 군사 행정을 맡기 위하여 군사 문제에 밝은 관리들로 구성된 임시 기구였다. 그러던 것이,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그 기능이 점차 강화되어, 조선 후기에는 일반 행정까지 맡아 보는 국가의 최고 기관이 되었다. 비변사의 기능이 커짐으로써, 종래 행정의 최고 기관이던 의정부의 기능이 약화되었고, 왕권도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5군영

군역 의무를 진 장정이 직접 군대에 입대하여 근무하는 것을 바탕으로 운영되던 5위제는 16세기에 들어와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군역 의무자가 다른 사람을 대신 군대에 내보내는 일이 많아지자, 정부는 군역 의무자에게 군대에 나가는 대신 군포를 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대가 허약해졌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정부는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에 5위의 군제를 개편하여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을 설치하고, 급료를 받고 근무하는 군인을 위주로 하는 군제를 마련하였다.

훈련도감은 왜란 중에 설치된 군영으로서, 포수, 살수, 사수의 삼수병을 훈련시켰다. 삼수병은 급료를 받고 근무하였다. 그 후,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금위영이 설치됨으로써 5군영 체제가 갖추어졌다. 5군영은 군역 의무를 진 사람이 현역으로 근무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급료를 받고 근무하는 군인이 중심을 이루었다.

확대보기
남한산성 수어장대(경기 광주)
남한산성 수어장대(경기 광주)
팝업창 닫기

한편, 지방군은 왜란 중에 속오군 체제를 갖추었다. 속오군은 양반으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분층의 사람들로 편성된 군대였다. 속오군은 농한기에 훈련을 받고 평상시에는 농사를 지으면서 향촌을 지키며,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가하도록 조직되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의 5군영과 지방의 속오군이 군대의 중심을 이루었다.

영정법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국토가 황폐해져, 경작지의 면적이 왜란 전에 비하여 크게 줄어들었다. 더욱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진 틈을 타서 일부 관리들이 부정을 저질러 국가 수입은 크게 줄어들었고,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이에, 정부는 새로 농토를 개간하고, 버려졌던 농토에 다시 농사를 짓게 하여 경작지를 넓혀 갔다. 그리고 토지를 측량하고, 토지 대장을 새로 만들어 농경지의 파악에 힘썼다. 정부는 또 농민의 세 부담을 덜어 주고 묵은 땅의 개간을 장려하기 위하여 영정법을 실시하였다. 영정법의 실시로 전세는 1결당 쌀 4말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전세 수입은 경작지가 늘어난 만큼 늘어나지는 않았다. 그것은 전세가 면제된 궁방전, 관둔전 등이 늘어났으며, 토지 대장에서 빠지는 농토가 많아져 갔기 때문이다.

대동법

정부는 농민에게 부담이 컸던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여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공납제는 각 지역의 토산물을 현물로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그 지역에서 나지 않는 물품을 공물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거두어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을 뿐 아니라, 관리들의 부정이 끼여들기 쉬워 방납이 성행하는 등 많은 폐단이 있었다.

대동법은 왜란 직후, 이원익 등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되다가, 그 후 점차 확대되어 18세기 초에는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토산물로 바치던 공납을 농토의 면적에 따라 쌀이나 베 또는 돈으로 내게 하는 제도였다.

확대보기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대동세의 징수와 운송
팝업창 닫기

정부는 받아들인 쌀, 베, 돈을 공인에게 주어 필요한 물자를 사들여 썼다. 이에 따라 상업 활동이 활발해지고, 재산을 많이 모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또, 공인들이 필요한 물품을 수공업자에게 주문함으로써 수공업도 활기를 띠게 되었다.

대동법의 실시로 국가의 수입이 늘어나고, 농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갔다. 그러나 이 법을 실시한 후에도 일부 공물은 여전히 현물로 징수되었으며, 또 이 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늘어나, 대동법을 실시한지 얼마 되지 않아 농민들의 부담은 이전과 별 차이가 없게 되었다.

균역법

군역 의무자의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농민들은 장정이 되면 군역의 의무를 져 군대에 나가거나 보인(봉족)이 되어 군역의 의무를 대신하였다. 그러던 것이 16세기 이후에는 직접 군대에 나가지 않는 대신에 군포를 바치는 것으로 바뀌었다. 군포는 대체로 장정 한 사람당 1년에 2필씩이었다.

군역 의무가 군포의 납부로 바뀌고 난 후, 군포를 여러 관청에서 제각기 받아들였으므로 한 사람의 장정이 이중, 삼중으로 부담하는 일이 많았다. 여기에 더하여 군포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실무를 담당한 관리들의 부정으로, 군포를 내지 않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몫까지 떠맡아야 하는 현상도 벌어졌다.

이렇게 군포 수납을 둘러싸고 폐단이 날로 심해지자, 농민들은 군역을 지지 않으려고 도망가거나 신분을 속이기도 하였다. 이에, 농민에게 괴로움을 주어 왔던 군포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논의가 숙종 때부터 거세게 일어나 영조 때에 이르러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농민 장정들은 1년에 1필의 군포만을 부담하게 되었고 군포를 내지 않던 사람들 중의 일부도 군포를 내게 되었다.

균역법의 실시로 줄어든 군포 수입을 보충하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농토 1결마다 쌀 2말씩을 결작이라는 이름으로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종래 왕실 등에서 받아 오던 어장세, 염세, 선박세를 국가에서 받아들였다.

균역법의 실시로 농민들의 부담은 어느 정도 가벼워졌다. 그러나 관리들의 부정이 그치지 않고 그 폐단이 다시 심해져,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전국적인 농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확대보기
균역청사목
균역청사목
팝업창 닫기

탕평책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정치가들이 학문적 성향과 정치 이념에 따라 붕당을 이루고, 여론을 앞세워 국정을 담당하는 붕당 정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7세기 말에 이르러 붕당 사이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면서 붕당 정치가 제대로 행해지지 못하고 하나의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붕당이 급격히 바뀌는 일이 거듭되었다.

이에 따라, 붕당 사이에 점차 정치적 대립이 심해지면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다. 이처럼 붕당 사이의 대립이 심해져 왕권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확대보기
탕평비(서울 성균관 대학교)
탕평비(서울 성균관 대학교)
팝업창 닫기

영조는 또 지나친 형벌이나 악형을 금지시키고,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켜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고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정비하였다.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계속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국왕 직속의 학술 및 정책 연구 기관으로 육성하였으며, 편찬 사업에도 힘을 기울여 대전통편, 규장전운, 탁지지 등을 편찬하였다.

또, 농업을 발달시키고, 상업 활동을 보다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영조와 정조의 노력으로 정치와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

도움글

* 이익의 붕당론

〈곽우록에서〉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 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 관계가 오래 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 열 사람이 함께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 조정의 붕당도 어찌 이와 다를 것이 있겠는가? 대개 과거 제도가 번잡하여 인재를 너무 많이 뽑으며, 애증에 치우쳐서 진퇴가 일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이 밖에도 벼슬길이 분분하게 많으니, 이것이 이른바 관직은 적은데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많아서 모두 조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당파가 생긴 뒤로는 아무리 총명하여도 제대로 판단하기 어렵다. 중립을 지켜 시비를 가리는 자를 용렬하다고 하고, 붕당을 위해 죽어도 굽히지 않는 자를 절개가 뛰어나다고 한다. 또, 영예와 치욕이 갑자기 뒤바뀌니, 사람들이 어찌 붕당을 만들어 싸우지 않겠는가?

* 영조의 탕평책

조선 후기에 붕당 간의 심한 대립을 막고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탕평책이라 한다. 탕평이란, 국왕의 정치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이 지극히 공평한 지경에 이른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 용어가 처음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은 숙종 때 박세채에 의해서였다. 그는 당시에 격렬해지는 노론과 소론 간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서 파당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가 곧 병사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탕평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정치적인 기반이 조성되지 못하여 탕평론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탕평이 다시 강조되고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확립된 것은 영조 때에 와서였다. 영조는 이미 왕세제 시절에 붕당 간의 정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곧 이의 조정에 힘썼다.

영조는 먼저 붕당을 만드는 자는 종신토록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고, 이어서 노론의 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막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하였다. 또, 영조는 각 파의 온건론자들을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쳐 나갔다. 이러한 가운데 어느 정도 탕평 정국을 이루어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 등의 인물도 등용되었으며, 당파에 관계 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영조는 자신의 탕평책을 알리기 위해 유학의 본산이며 관학의 최고 학부인 성균관에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고 친히 쓴 탕평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학습 정리

1. 조선 후기에는 훈련도감을 비롯한 중앙의 5군영과 지방의 속오군이 군대의 중심을 이루었다.

2. 왜란 이후, 정부는 농민 생활의 어려움을 덜어 주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을 실시하였다.

3. 17세기 말엽 붕당 사이의 세력 균형이 깨어지면서 하나의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여 왕권이 약화되자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