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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의병 전쟁

학습 개요

우리 나라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 다툼은 결국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으로 압축되어 갔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을사조약이 강요되자 우리 민족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지사들은 친일 인사들을 처단하는 데 앞장 서거나 자결하기도 하였다.

한편, 무기를 들고 일제에 대항하는 의병 운동이 확대되었다. 군대의 강제 해산을 계기로 의병의 대일 항쟁은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여 전국에서 일본 군경에 대항하여 싸웠다. 그 후 의병 부대는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군의 모체가 되기도 하였다.

학습 문제

1. 러⋅일 전쟁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은 무엇인가?

2. 우리 민족은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어떻게 펼쳤는가?

3. 의병 운동의 성격과 그 전개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4. 독도와 간도에 대한 일제의 침탈 과정은 어떠하였는가?

러⋅일 전쟁과 일제의 침략

삼국 간섭으로 러시아는 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는 등 그 세력을 확대시키고, 우리 나라에도 각종 이권을 강요하면서 침투해 왔다. 러시아는 그 동안 추진해 오던 남하 정책의 일환으로 부산 부근의 마산포에 해군 기지를 만들려고 하였으며, 만주에 군대를 주둔시키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 세력의 증대는 청⋅일 전쟁 후 적극적으로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던 일본과의 대립을 격화시켰다.

이 때, 세계의 여러 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은 영⋅일 동맹을 맺고 일본을 도왔는데, 영국은 우리 나라에서 일본의 이익을 인정하는 약속을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와 일본의 대립으로 드디어 러⋅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1904).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은 즉시 서울과 지방의 군사 요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일본이 군사상 필요한 곳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정치에 간여할 수 있도록 하는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어서 러⋅일 전쟁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자 일본은 한⋅일 협약을 강요하였다. 이 협약의 내용은 우리 나라의 재정과 외교 분야에 일본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는 것으로서, 일본이 우리 나라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정과 외교 분야뿐만 아니라 군사, 교육, 경찰 분야에까지 고문을 두어 우리 나라는 정치, 외교에서 자주권을 크게 침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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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주변 정세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주변 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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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과 민족의 저항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조약을 강요하였다(1905).

이 때, 고종 황제를 비롯하여 내각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대궐을 포위하고 친일 대신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조약을 발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여 외교권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 내정 전반을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미국과 영국 등 열강은 동아시아에서 그들의 이익을 보장받는 대가로 일본의 침략을 묵인하였다.

을사조약이 일본에 의하여 강요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반대하는 민족의 분노가 여러 가지 형태로 폭발하였다. 국민들은 통곡을 하면서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였으며, 상인들은 일제히 철시를 하여 저항하였다. 학생들은 자진하여 휴학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고종 황제에게 조약을 파기하도록 탄원하기도 하였다.

장지연은 황성 신문에 ‘시일야 방성 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불법적인 조약 강요의 과정을 폭로하고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이에 앞장 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대한 매일 신보나 제국 신문도 을사조약 반대 운동의 소식을 자세히 보도하여 민족의 항일 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그리고 민영환은 을사조약을 막지 못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라고 하면서,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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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
민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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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투쟁의 재개

을사조약이 강요되기 전부터 이미 경기도와 강원도를 비롯한 중부 지방의 곳곳에서 의병 활동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을사조약 강요 이후에는 규모가 큰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이 때 의병장으로 활동한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최익현, 신돌석 등을 들 수 있다.

당시 유생들의 지도자였던 최익현은 제자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 부대를 일으켜 순창에서 큰 세력을 이루었다. 최익현은 정부의 진위대가 공격을 해 오자 왜적이 아닌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고 하면서 전투를 중지하고 체포당하였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쓰시마 섬에 잡혀갔다가 그 곳에서 순국하였다.

평민 출신인 신돌석은 평해, 울진, 영해 등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항일 의병 투쟁 과정에서 평민 출신인 신돌석이 의병장이 되었다는 사실은, 의병 운동이 신분을 초월한 국권 수호 운동으로 전개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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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모습
의병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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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와 군대 해산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민족의 저항 운동이 전개되는 속에서 고종 황제는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을사조약을 무효화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마침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 평화 회의가 열리자, 고종 황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침략 사실을 세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 세 사람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하였다(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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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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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각국의 대표들에게 을사조약이 불법적으로 강요되었음을 주장하였으며, 만국 기자 협회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연설을 하는 등 우리 나라의 사정을 알리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본이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방해 공작이 심하였기 때문에 세 특사는 회의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이준 열사는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못함을 통분한 나머지 그 곳에서 순국하였다.

헤이그 특사 파견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은 그들의 침략에 방해가 되는 고종 황제를 위협하여 강제로 퇴위시켰다(1907).

이어서 일본은 우리 나라의 재정이 어렵다는 구실을 붙여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군대가 해산당하자 군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해산 당일,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한 것을 계기로 시위대는 서울 시내에서 일본군과 시가전을 벌였으며, 원주, 강화, 충주, 진주 등지의 진위대도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한편, 해산된 군인들은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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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제국의 군인들
대한 제국의 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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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전쟁의 확대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게 됨으로써,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고, 새로운 무기도 갖추게 되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의병들의 항일 투쟁은 이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함으로써 범국민적인 대일 전쟁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는 가운데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각지의 의병 부대가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폈다.

그리하여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이 편성되어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로 진공하게 되었다. 허위가 거느린 선발대가 서울 가까이까지 진격하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후원군의 부족으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의병들은 각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하였으나, 무기와 전투 경험의 부족으로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으로 의병 활동은 점차 약화되었고, 일부 의병 부대는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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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부대의 활동
의병 부대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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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 활동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민족 운동으로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 전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침략의 원흉이나 매국노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의 원한을 풀고 침략을 막으려는 의사와 열사들의 의거 활동이 국내외에서 계속되었다.

일본의 추천으로 우리 나라에 외교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스티븐스가 미국에 돌아가서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였다. 이 때 미국에 있던 전명운, 장인환은 이에 격분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를 사살하였다. 두 의사의 의거는 미국에 있는 동포들의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미국인들이 우리 나라를 바로 알게 하는 데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한편, 국내외에서 의병장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초대 통감으로 우리 나라 침략에 앞장 섰던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1909). 안중근은 우리 나라와 대륙에 대한 일본의 침략을 막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유지함과 아울러 동아시아에 평화를 이룩한다는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었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안중근의 강한 애국심과 정의감, 그리고 죽음을 초월한 의연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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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글씨
안중근의 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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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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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도 친일 인사에 대한 국민의 원성이 높아 갔으며, 이들을 처단하려는 의사들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재명은 일본의 앞잡이 구실을 해 온 이완용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부상을 입히는 데 그치고 말았다. 또, 나철과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조약에 동의하였던 매국노들을 숙청하려 하였으나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독도와 간도

일본은 우리 나라를 침략하면서 독도를 강탈하는 한편, 간도 지방을 제멋대로 청나라에 넘겨 주었다.

독도는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일찍부터 우리 나라의 영토로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초기에 유민을 막기 위하여 울릉도에 사는 사람들을 본토에 옮겨 살게 하여 일시적으로 정부의 관리가 소홀해지기는 하였으나, 우리 나라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하는 거점으로 계속 활용되어 왔다.

조선 숙종 때에는 동래에 사는 어민 안용복이 이 곳에 왕래하는 일본 어부들을 쫓아 버리고, 일본에 건너가서 독도가 우리 나라의 영토임을 확인시킨 일도 있었다.

그 후에도 일본 어민들이 자주 울릉도 부근에 불법으로 접근하여 고기를 잡아가는 일이 있었으나, 정부에서는 이 곳에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이주를 장려하고 관청을 설치하여 독도까지 관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러⋅일 전쟁 중에 독도를 강제로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

한편, 간도는 고구려와 그 뒤를 이은 발해의 땅으로서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였다. 여진족이 청을 건국한 뒤에는 이 지역을 그들 조상의 발상지라고 하여 다른 민족의 이주를 금지하였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이 곳곳에 살고 있었다.

조선 숙종 때에는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간도를 우리 나라 영토로 표시하였다. 그 후에도 간도에는 우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서 황무지를 개척하고 논밭을 일구며 생활 터전을 넓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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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해외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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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정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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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청은 우리 나라 사람들의 철수를 강요하며 간도가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였으나, 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우리 나라 사람들을 보호하며 다스렸다.

을사조약으로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은 만주 지방의 침략을 위해, 안동과 봉천 간의 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에 넘겨 주는 간도 협약을 체결하였다(1909).

도움글

* 장지연의 ‘시일야 방성 대곡’

지난날 이등 후작이 한국에 옴에 어리석은 우리 국민이 서로서로 모여 말하기를, 이등 후작은 평시에 동양 3국의 안정과 안녕을 맡아 주선하던 인물이라 금일에 한국에 옴에 반드시 우리 나라의 독립을 공고하게 세울 방략을 권고하리라 하여 항구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 상하가 크게 환영하였더니, 세상일이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디로 비롯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대한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의 분열하는 조짐을 만들어 낸 것인즉 이등 후작의 처음의 원래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가.……

그러하거늘 저 돼지와 개만도 못한 우리 정부의 소위 대신 된 자들이 영리를 바라고 덧없는 위협에 겁을 먹어 놀랍게도 매국의 도적을 지어 4천 년 강토와 5백 년 사직을 다른 나라에 갖다 바치고 2천만 국민으로 타국인의 노예를 만드니 저들 개, 돼지만도 못한 외부 대신 박제순 및 각 대신은 족히 깊이 책망할 가치도 없는 자들인 것이다.

그러하거니와 명색이 참정 대신인 자는 정부의 수석 대신이라, 단지 부(否)자로써 책임을 궁색하게 면하여 명예를 구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가. 청음 김상헌의 서류를 찢는 통곡도 불능하고 동계 정온의 할복하는 것도 불능하고 여전히 생존하여 세상에 다시 서니 무슨 면목으로 강경하신 황상 폐하를 다시 대하며 2천만 동포를 다시 대하리요.

아아 분하도다! 우리 2천만, 타국인의 노예가 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졸연히 멸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학습 정리

1.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을사조약을 강요하여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침략에 나섰다.

2. 우리 민족은 일제의 주권 침탈에 맞서 의병의 항전, 의사⋅열사의 의거, 언론⋅외교 활동 등 을사조약 반대 투쟁을 활발히 벌였다.

3. 의병 운동은 무력으로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적극적인 민족 운동으로서, 군대 해산 이후에는 의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4. 일본은 러⋅일 전쟁 중 독도를 불법적으로 빼앗았으며, 대륙 침략을 위해 간도를 청에 넘겨 주었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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