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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한 민국 임시 정부

학습 개요

3⋅1 운동 이후 우리의 민족 지도자들은 각지에 여러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이들 임시 정부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 정부로서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항일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간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 한민족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민족의 활동 무대가 확대되었다. 특히, 만주 지방은 독립 운동 기지로 발전하여 독립군이 항일 독립 전쟁을 추진하는 토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군이 조직되어 독립 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학습 문제

1.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어떻게 수립되었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2. 무장 독립군의 항일 독립 전쟁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3.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어떻게 항일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는가?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과 활동

거족적으로 일어났던 3⋅1 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민족의 독립으로 연결되지는 못하였으나, 우리 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의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그리고 보다 조직적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기 위하여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국내외에서 일어났다. 그리하여 국내외에 여러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들 임시 정부는 상하이의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1919).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정을 기본으로 한 민주주의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대통령제를 채택하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 후 임시 정부는 몇 차례의 헌법 개정으로 정부 체제가 바뀌다가 광복 직전에는 김구가 주석이 되어 정부를 이끌었다.

대한 민국 임시 헌장 10조 내용

1. 대한 민국은 민주 공화제로 함.

2. 대한 민국은 임시 정부가 임시 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이를 통치함.

3. 대한 민국의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

4. 대한 민국의 인민은 신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등 신체 및 소유의 자유를 가짐.

5. 대한 민국의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있음.

6. 대한 민국의 인민은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가 있음.

7. 대한 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 연맹에 가입함.

8. 대한 민국은 구 황실을 우대함.

9. 생명형, 신체형과 공창제를 전폐함.

10. 임시 정부는 국토를 회복한 후 1년 안으로 국회를 소집함.

임시 정부는 본국의 각지를 연결하는 연통제를 통하여 독립 운동을 이끌었으며,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또, 독립 신문을 간행하여 국내외 동포에게 독립 운동의 소식을 알려 독립 정신을 일깨우고, 여러 독립 운동 단체에 독립 운동의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모아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수립된 정부로서 겨레의 지지를 받으며,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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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요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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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일제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민족 지도자들은 장기적인 민족 운동의 추진을 위해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국권 침탈을 전후해 이 지역에는 서전 서숙, 동창 학교 등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으며, 또한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무장 독립 운동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특히, 두만강 건너에 있는 현재의 연길, 용정 등지에는 한민족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여 민족 교육의 전통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국내에서 추진되었던 민족 교육 운동과 무장 의병 활동은 일제의 간섭이 비교적 덜 미치는 이 지역에서 계승되어 민족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만주의 각지에서도 나타났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하여 독립군의 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한편, 한민족의 거주 지역은 연해주 일대에도 형성되어 일찍부터 독립 운동 단체들이 활동할 수 있었다. 이상설 등이 중심이 된 대한 광복군 정부는 그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독립군의 항전

만주와 연해주에는 3⋅1 운동을 전후하여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이들 독립군 부대 가운데서 만주의 대한 독립군, 북로 군정서군, 서로 군정서군, 국민회군과 연해주의 혈성단 등이 대표적이었다. 이들은 국경 지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으며, 자주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 부대와 경찰서 등 식민 통치 기관을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일본군은 이러한 독립군의 활동을 막기 위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봉오동을 습격해 왔다. 이에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일본군을 맞아 이를 무찔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1920).

봉오동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더욱 규모가 큰 부대를 보내어 독립군을 습격하는 한편, 각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마구 학살하면서 독립군을 포위하여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였다.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 일대에 집결하여 일본군과 싸워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다(1920). 청산리 대첩은 한민족의 독립 전쟁 과정에서 거둔 가장 큰 승리였으며, 우리 겨레에게 용기와 함께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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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청산리 대첩(민족 기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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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독립군들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독립 전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여러 독립군 단체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3부로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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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활동 영역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활동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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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3부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 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된 자치 정부의 성격을 띠었으며, 독립 운동을 장기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가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면서 독립군 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으나, 독립군은 일제의 침략을 막으려는 중국군과 한⋅중 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본토로 옮겨 간 후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으로 편성되었다.

한국 광복군의 대일 전쟁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일제의 대륙 침략으로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상하이에서 충칭으로 옮기고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본토로 이동해 온 독립군을 바탕으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였다(1940).

한국 광복군에는 중국 각지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무장 세력이 편입되었으며, 일본 군대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탈출한 한국 청년들도 합류하였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손을 잡고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 각지에서 중국군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뿐만 아니라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서도 영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싸웠다. 또, 광복군은 중국에서 미군의 협조로 특수 훈련을 받으며, 국내에 진입하여 일제를 몰아 내고 조국의 광복을 달성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 때, 미국에 있던 우리 동포들 가운데는 의용군으로 미국군에 참가하여 독립 전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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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광복군의 특수 대원
한국 광복군의 특수 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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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적극적인 독립 전쟁은 여러 나라에 알려져, 세계 열강은 한국의 독립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연합국 수뇌들이 모인 카이로 회담(1943)과 포츠담 선언(1945)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되었다.

애국 지사들의 독립 투쟁

3⋅1 운동 이후 조직적인 무장 항일 전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애국 지사들은 비밀 조직을 결성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폭파하거나, 국내외에서 일제의 요인을 처단하는 등의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활동을 벌인 대표적인 조직이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과 김구가 이끈 한인 애국단이었다.

의열단원 김상옥은, 독립 투사들을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가하는 데 앞장 섰던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하였다. 또, 나석주는 한국의 농토를 빼앗으면서 경제적 착취를 자행하였던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한인 애국단원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일본 국왕을 처단하기 위하여 국왕의 마차에 폭탄을 던졌다.

한편, 윤봉길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인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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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애국단장 김구와 윤봉길
한인 애국단장 김구와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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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사의 자필 선서문
윤봉길 의사의 자필 선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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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의사들의 의거 투쟁은 국내외 한민족의 독립 의지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한국인의 용기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도움글

* 서일 북로 군정서 총재의 보고

이번 전투(청산리 대첩)에서 모든 면에서 승산이 있었던 적이 오히려 패하고, 모든 면에서 불리했던 아군이 어떻게 능히 이길 수 있었는지 간략히 진술한다.

(1) 적이 패배한 이유

○ 병가에서 가장 금기하고 있는 적을 경솔히 하는 행위로서 깊은 골짜기와 숲을 별로 수색도 없이 경계도 없이 맹목적으로 진군하다가 항상 일부 혹은 전부가 함몰당하였다.

○ 국지 전술에 대한 경험과 연구가 부족하여 삼림과 산지 가운데서 자주 스스로 다치며 충돌하는 일이 있었다.

○ 군인들의 마음이 전쟁을 두려워하고 살아 남기 위하여 도망하는 일이 극도에 달하여, 군기가 문란하며 사격이 정확하지 못해 덮어놓고 총을 쏘기만 하였다.

(2) 아군이 승리한 이유

○ 생명을 가리지 않고 분연히 용감하게 싸우려는 독립에 대한 군인 정신이 먼저 적의 사기를 압도하였다.

○ 양호한 진지를 앞서 차지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의 성능을 극도로 발휘할 수 있었다.

○ 임기 응변의 전술과 예민하고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를 찔렀다.

오호라, 3일간 전투에 식량 길이 막히어 5~6개의 감자로 배고픔을 달래고, 하루 낮 하루 밤에 능히 1백 50여 리의 험한 밀림을 통행하거나 전투 후 수백 리의 긴 숲과 눈밭을 걸어 동상에 걸림이 적지 않으나 이를 조금도 탓함이 없었으니, 참으로 독립의 장래를 위하여 희망한 바이더라.

학습 정리

1.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수립된 여러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정을 지향하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국내외의 독립 운동을 하나로 통합하여 보다 적극적인 항일 독립 전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2. 만주 지방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한 독립군 부대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3.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편성하여 항일 독립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국내 진입 작전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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