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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민족 문화 수호 운동

학습 개요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침략 전쟁은 중⋅일 전쟁에 이어 태평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한민족과 그 문화를 말살하려 하였으며, 나아가 한민족을 그들의 전쟁에 앞장서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식민지 정책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커다란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한민족은 민족 존폐의 위기에서 민족을 보존하고 전통 문화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즉, 국학, 교육, 종교, 언론, 문학, 예술 등 각 분야에 걸쳐 민족의 주체 의식과 민족 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습 문제

1. 1930년대 후반 이후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은 어떻게 추진되었는가?

2. 1930년대 후반 이후 민족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3. 국어와 국사의 연구 활동은 어떠하였는가?

4.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민족의 저항 의식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중⋅일 전쟁으로 중국 대륙을 침략한 일제는 전쟁을 더욱 확대시켜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1941).

일제의 침략 전쟁으로 우리 나라는 일본의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 기지로 변하였다. 일제는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에 금속, 기계, 화학 공업 등을 중심으로 하는 군수 공장을 건설하였으며, 철, 석탄, 텅스텐 등 지하 자원을 약탈하였다. 또, 우리 민족의 식량을 강제로 약탈하였으며, 전쟁의 막바지에는 고철, 놋그릇, 수저까지도 빼앗아 갔다.

일제는 이와 같은 물적인 약탈뿐만 아니라, 한국인을 강제 징용으로 끌고 가 광산이나 공장에서 고통스러운 노동을 강요하였으며, 강제 징병제와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에 많은 한국의 청⋅장년들이 각지의 전선에서 희생되었다. 이 때 여성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끌려가 일본군의 위안부로 희생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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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징용되어 혹사당하는 한국인
일제에 징용되어 혹사당하는 한국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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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일제는 우리의 물적⋅인적 자원을 약탈하는 한편, 우리 민족과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내선 일체와 황국 신민화 등의 구호를 내걸고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만들어 한민족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어의 사용을 금하고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으며, 학교에서 한국 역사에 대한 교육을 금지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의 성명을 바꾸어 일본식 성과 이름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각지에 일본 신사를 세워 참배하도록 하였으며, 어린 학생들까지도 황국 신민 서사를 외우도록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이러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갖은 고통을 겪으면서도 민족과 민족 문화의 전통을 지키려는 투쟁을 계속하였다.

한글의 연구

민족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 문화의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한글을 연구하고 이를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된 조선어 학회는 한글 보급에 노력하면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여 한글의 과학적인 체계화를 이룩하였다. 또,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우리말 큰사전의 머리말

말은 사람의 특징이요, 겨레의 보람이요, 문화의 표상이다. 조선말은, 우리 겨레가 반만 년 역사적 생활에서 문화 활동의 말미암던 길이요, 연장이요, 또 결과이다. 그 낱낱의 말은, 다 우리의 무수한 조상들이 잇고 이어 보태고 다듬어서 우리에게 물려준 거룩한 보배이다. 그러므로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 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조선어 학회의 한글 연구와 보급 활동은 한민족의 민족 정신을 앙양하고 민족 문화 전통을 계승하려는 민족 운동의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민족 말살 정책을 추진하던 일제는, 조선어 학회가 독립 운동을 한다는 구실로 회원들을 체포하고 강제로 해산시켰으며, 체포된 회원들은 갖은 고문을 받으며 희생을 당하였다.

국사의 연구

한글의 연구와 함께 우리 역사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일본은 일찍부터 그들의 침략에 이용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나쁘게 평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놓았다. 이에 대항하여 한민족의 역사가 독자적이고 자주적으로 발전하였으며, 독창적인 문화를 이룩하였음을 밝힘으로써 민족 의식을 고취하려는 노력이 국사의 연구로 나타났다.

이미 박은식과 신채호는 민족사의 주체적인 발전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사학을 이룩하였고, 이를 이어받아 정인보, 문일평 등이 국사의 연구를 계속하였다.

한편, 일제의 침략 정책에 따라 한국사를 왜곡시키고 있는 일본 어용 학자들에 대항하여 이병도, 손진태 등은 진단 학회를 조직하였다. 진단 학회에서는 진단 학보를 발간하면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의 연구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면서 진단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진단 학보의 간행도 중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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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학보
진단 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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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활동

조선 일보와 동아 일보는 일제의 검열 제도에 대항하면서, 민족 사상의 고취, 민족 의사의 대변, 민족 문화의 계승, 재난 동포의 구호 등 민족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또, 이들 신문은 조선어 학회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보급하는 데 앞장 섰으며, 문맹 퇴치 등의 계몽 운동을 이끌기도 하였다.

특히,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하자, 동아 일보는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삭제한 사진을 보도하였다. 이는 마라톤의 우승자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내세운 것으로서, 당시 언론 기관의 민족 의식을 잘 나타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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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선수(동아 일보)
손기정 선수(동아 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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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와 같은 민족 언론 기관의 활동에 대하여 언론인 구속, 신문 압수, 발간 정지 등의 탄압을 가하였으며, 마침내 1940년경에는 이들 민족 신문을 모두 폐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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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로 삭제된 채 발간된 신문
검열로 삭제된 채 발간된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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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교육 활동

국권이 침탈된 직후부터 민족 종교인 대종교는 만주에서 동포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무장 독립 운동에 앞장 서 왔다. 천도교에서는 개벽, 신여성 등의 잡지를 발간하여 민족 계몽에 노력하였다.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도 사회 사업과 민중 계몽에 공헌하였는데, 특히 개신교에서는 일제가 강요하는 신사 참배에 항거하여, 많은 교회 지도자가 투옥되는 희생을 당하기도 하였다.

불교에서도 일찍이 한용운이 불교 유신론을 주장하여 민족 불교로서의 전통을 이어 갔고, 박중빈이 창시한 원불교는 저축과 근로를 중시하며, 국민에 대한 봉사 활동을 전개하고 자립 정신을 일깨웠다.

이들 종교 단체들은 각기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활동을 통한 민족 의식과 항일 정신을 키우는 데에도 공헌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은 민족 교육 활동을 억제하고 탄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제는 민족 교육을 이끌었던 많은 사립 학교들을 강제로 공립 학교로 전환시켰으며, 교육령을 바꾸어 학교의 교육 활동도 철저하게 통제하였다.

일제는 침략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학생들에게도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군수 물자를 모으는 일이나 힘든 작업에 학생들을 동원하는 등 학교를 병영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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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강제 동원된 소년병
일제에 강제 동원된 소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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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학생들은 비밀 결사 활동을 통하여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관한 책을 돌려 읽어 가면서 항일 의식을 키워 나갔다.

문예 활동

문학과 예술 활동에서도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살리며, 민족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3⋅1 운동 이후에 한용운, 심훈 등은 민족 의식을 고취하거나 민족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문학 작품을 많이 썼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 전쟁이 확대되고 민족 말살 정책이 실시되면서 문학 활동도 크게 탄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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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이 오면(심훈)
그 날이 오면(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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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에서는 토월회가 조직되면서 민족적인 정서가 담긴 작품들이 많이 공연되었다. 토월회는 전국을 순회 공연하면서 민중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한편, 영화에서는 나운규가 민족의 저항 의식과 한국적 정서를 영화에 부각시키고 한국 영화 예술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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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나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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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는 이중섭의 활동이 특히 두드러졌으며, 민족의 문화재를 연구하고 수집하는 데에 힘쓴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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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이중섭)
소(이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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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는 안익태, 홍난파 등이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봉선화, 고향 생각, 반달 등 민족적 감정이 담긴 작품들이 발표되었다. 이들 노래는 우리 동포들이 즐겨 애창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과 함께 민족의 정신적 단결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도움글

* 징용되어 끌려간 노동자의 체험담

〈김대상의 일제하 강제 인력 수탈사〉

머리에는 이가 득시글거리고, 등의 상처는 썩어서 더욱 심해져 갔다. 여기서는 조선말을 쓰면 한 끼의 밥을 줄여 버렸다. 밥이라고 해도 콩을 쪄서 안남미와 섞은 것이었다. 국은 소금국으로, 건더기가 없는 것이었다. 갱 내에서 목이 말라 갱 내의 붉은 물을 마시면 설사를 심하게 하였다. 그래도 아침 6시부터 밤 11시까지 일을 시켰다.

술이나 담배, 약품 배급은 조(組)에서 가로채어 배를 채우고 있었다. 당시 하루 임금은 2원 35전인데, 합숙소값으로 1원 50전을 떼었다. 그러나 작업화가 매일 떨어지기 때문에 한 결레를 3원 50전으로 매일 사게 하여 매일 적자가 났다. 돈을 주면 도망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하라다 조에서는 서울에서 온 교양 있는 집안의 아들이 도망치다가 붙들려 너무 심하게 매를 맞아 미쳐 버렸다. 집단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을 잘못 알고 건너다가 물 속에 빠져 죽는 예가 많았다. 봄이 되어 눈이 녹으면, 그 시체가 이시카리 강 언저리의 버드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것이 가끔 발견되었다.

1943년 12월 18일이었다. 임금이 1천 얼마로 체불되었는데, 고다루에 도착해서 준다고 했으나 주지 않았다. 하라다 조에 가서 독촉해 보니, 3백 원을 가족에게 송금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3개월을 기다려도 조선에서는 돈을 받았다는 소식이 오지 않았다.

학습 정리

1.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우리 민족과 민족 문화를 말살하려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2.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 문화의 전통을 지키고 이를 창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민족 문화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3. 조선어 학회는 우리 말과 글의 연구에 힘썼고, 민족주의 사학자와 진단 학회는 우리 역사의 연구에 힘썼다.

4. 문예 활동에서는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면서 민족 의식과 저항 의식을 고취하였다.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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