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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Ⅲ. 통일 신라와 발해
  • 2.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형성
  • [2] 신라는 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는가?
  • 온 나라를 뒤흔든 농민 봉기

온 나라를 뒤흔든 농민 봉기

신라 말의 사회 혼란은 9세기 말 진성여왕 때에 이르러 더욱 심해졌다. 중앙 귀족들은 부패하고 사치와 향락에 젖어 있었다. 나라안의 여러 주⋅군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아 나라의 창고는 비고 재정이 궁핌해졌다. 이에 왕이 지방에 관리를 보내어 독촉하였으나, 명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최치원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건의한 것은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러한 때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나돌아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비참하였다. 농민들은 굶주린 끝에 고향을 버리고 떠돌거나 도적 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9세기 말, 농민들은 전국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재정 부족을 이유로 관리를 보내어 세금을 독촉하자, 그 동안 억눌려 왔던 농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농민들은 조세를 거부하고 떼를 지어 각 지역의 관청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으로 변한 것이었다.

상주 지방을 근거로 하여 원종과 애노가 일어났고, 그 밖에 북원(원주)의 양길, 죽주(죽산)의 기훤, 완산주(전주)의 견훤, 그리고 양길의 부하인 궁예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지방 호족들 중에는 농민 봉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대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갖추고 차츰 힘을 모아 지역의 세력가로 성장하였다.

읽기자료

진성여왕 때의 농민 봉기

진성여왕 3년(889),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부세를 바치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고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자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니, 이로 인하여 곳곳에서 도적들이 벌 떼처럼 일어났다. 이 때 원종과 애노 등이 사벌주(상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나마 영기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진성여왕 10년(896), 도적들이 나라의 수도 서남쪽 방면에서 일어나 붉은색 바지를 입어 스스로 달리 하매, 사람들이 적고적이라 불렀다. 그들은 신라의 주와 현을 무찌르고 서울(경주)의 서쪽 모량리에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였다. ‘삼국사기
포석정 터 | 경북 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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