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Ⅲ. 통일 신라와 발해
  • 2. 신라의 동요와 후삼국의 형성
  • [2] 신라는 왜 후삼국으로 분열되었는가?
  • 후삼국 시대의 개막

후삼국 시대의 개막

9세기 말, 농민들의 봉기는 신라의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세력을 크게 모으고 나라를 세우는 데 성공한 사람은 견훤궁예였다.

견훤은 상주 출신으로, 본래 서남 해안을 지키던 군인이었다. 때마침 전국 여러 곳에서 농민들이 봉기하여 나라를 뒤흔들자, 그는 황해안의 해상 세력과 도적 떼 등을 자신의 군사 기반으로 흡수하여 자립하였다. 견훤은 나주를 거쳐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북상하여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900).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인데, 중앙의 권력다툼에서 희생되어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궁예는 처음에 양길의 부하로 있었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자립한 후 강원도, 경기도 일대에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어 송악 지방의 왕건 부자를 포함한 중부 지역의 일부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송악을 근거지로 후고구려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다(901), 이리하여 신라는 분열되고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읽기자료

궁예는 왜 달라졌을까? ⋅

진성여왕 8년(894)에 명주(강릉)에 들어가, 거느린 무리 3500명을 14개 부대로 편성하고 …… 병졸과 더불어 괴로움과 즐거움, 어려움과 편함을 함께 하였고, 관직을 주고 빼앗음에 있어서도 공정하게 하여 사사로움이 없게 하였다. 이로써 뭇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신덕왕 4년(915), 궁예의 부인 강씨가 왕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일을 많이 행하므로 얼굴색을 바르게 하고 이야기하니, 궁예가 미워하여 “네가 다른 사람들과 간통하니 무슨 일이냐?” 하니, 강씨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으리요.” 하였다. 왕이 “내가 신통력으로 보아 안다.” 하고 무쇠 방망이를 불에 달구어 강씨를 쳐 죽이고 두 아들까지도 죽였다. 이후 의심이 많고 화를 잘 내니, 여러 보좌관과 장수, 환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고, 부양(평강)⋅철원 일대의 사람들이 그 피해와 독을 견디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후삼국의 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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