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Ⅳ. 고려의 성립과 발전
  • 3. 몽골과의 전쟁과 자주성의 회복
  • [3] 고려 후기의 개혁 정치는 무엇을 추구하였는가?
  • 전제 개혁과 고려 왕조의 멸망

전제 개혁과 고려 왕조의 멸망

원을 멸망시킨 명과 고려는 처음에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명이 철령 이북의 고려 영토를 그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해오면서 두 나라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고려는 이를 거부하고, 나아가 명이 차지한 요동 지역까지 수복하려 하였다. 5만의 고려 군사를 이끌고 요동을 향해 출정한 이성계는 압록강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우왕을 폐위하였으며. 요동 정벌을 주도한 최영을 제거하였다. 이를 위화도 회군이라고 한다(1388).

이성계 일파는 정도전, 조준신진 사대부 세력과 손잡고 본격적인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들은 당시 사회 모순의 근원인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기 위한 전제 개혁을 주요한 목표로 삼았다. 이들은 권문세족 등 구세력의 토지를 몰수하여 신진 관료들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제정하였다. 경제적인 기반을 상실한 권문세족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였고, 정몽주 등 개혁에 소극적인 세력도 제거되었다.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무인 세력과 개혁에 참여한 정도전, 조준신진 사대부들이 새로운 지배 세력이 되어 마침내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였다(1392).

명의 철령위 설치

원이 쌍성총관부를 두어 지배하였던 철령 이북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명이 주장한 것이다.

과전법

공양왕 3년(1391)에 실시된 토지 제도로, 조선 시대의 기본적인 토지 제도가 되었다.
읽기자료

⋅ 고려 말 토지 제도의 문란 ⋅

“근래에 힘있는 무리들이 마음대로 토지를 빼앗아 좋은 밭과 토지를 모두 자기들의 소유로 하고, 높은 산과 큰 하천으로 경계를 삼았습니다. 또, 각각의 집에서 보낸 교활한 노비들이 마음대로 빼앗고 거두어 그 폐해가 매우 심해 백성들이 마음놓고 살 수 없고, 나라의 근본이 날로 위태로워졌습니다. …… 창고는 비고 나라의 쓰임새는 부족하며 녹봉은 날로 감소하니 선비를 장려할 길이 없습니다. …… 이번의 계책으로 사전을 혁파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민생을 두텁게 하며 널리 축적하여 나라의 쓰임새에 두루 쓰이게 하면 심히 다행이겠나이다.” ‘고려사’
선죽교 | 경기 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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