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어린 고종이 즉위하자 집권한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하에서 흐트러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다. 잘못된 정치 때문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있던 백성들은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책을 크게 환영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먼저, 오랫동안 세도를 부리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 내고,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리고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려 국가 재정을 어렵게 하고 농민을 괴롭혀 오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이 때, 흥선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내가 용서치 않는다.”는 단호한 결의로 47개소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하였다.
또,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양전을 실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였으며,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나아가, 흥선 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경복궁을 중건하였으며, ‘대전회통’을 편찬하여 통치 규범을 재정비함으로써 정치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개혁 정치는 세도 정치 때문에 어지러워진 정치를 안정시켰고, 국가 재정을 늘렸으며, 백성들의 기대에도 어느 정도 부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에 대하여 일부 양반들은 크게 반발하였다. 특히, 서원을 정리하는 일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양반이 많았다. 한편,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을 다시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고, 강제 기부금인 원납전을 거두었으며, 도성 문을 드나드는 백성들에게 문세를 거두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또, 당백전의 사용으로 물가가 올라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기도 하였다.
⋅ 왕권 강화를 위한 흥선 대원군의 의지 ⋅
흥선 대원군은 외척 세도 정치의 그늘에서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생활하였다.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에 눌려 살아야 했던 그는 왕실의 허약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서원 철폐 ⋅
흥선 대원군은 고종 2년(1855) 3월에 서원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만동묘의 철폐를 명하였다. 그러나 서원 철폐는 경복궁 중건 공사와 병인양요를 치르는 동안 실행이 지연되다가, 고종 8년(1871)에 전국에 명을 내려 문묘에 모신 인물에 한하여 각각 서원 1개소씩만 남기고 모두 폐쇄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