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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Ⅶ. 개화와 자주 운동
  •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 [2]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한 까닭은?
  •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천주교 박해와 병인양요

흥선 대원군이 집권할 즈음 국내에는 상당수의 천주교 신자가 있었으며, 프랑스 선교사도 각지에서 비밀리에 선교 활동을 하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은 처음에는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그런데 1860년에 청의 베이징이 서양 세력에 의해 함락되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조선에서는 서양 세력 및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졌다. 흥선 대원군도 러시아에 위협을 느끼고, 국내에서 활동 중인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의 힘을 빌려 러시아 세력을 막아 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프랑스와 교섭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마침 국내에서 천주교를 반대하는 기운이 높아지자, 흥선 대원군은 그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함께 수많은 천주교도가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프랑스는 선교사의 죽음을 구실로 삼아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에 침입하여 강화 산성을 점령하였다. 이를 병인양요라 한다(1866). 이 때, 프랑스군은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각종 서적과 문화재를 약탈하였다. 흥선 대원군의 집권 이래 군사 제도를 정비하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왔던 조선 정부는 각지의 포수를 뽑아 한강 연안의 수비를 강화하였고, 양헌수 부대는 삼랑성(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병인양요오페르트를 비롯한 서양인들이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거세어졌다.

읽기자료

⋅ 프랑스 공사의 위협 ⋅

우리 정부는 이와 같은 유혈의 폭행(1866년의 병인박해로 프랑스 신부 9명이 처형된 사건)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국민을 죽인 그 날이 바로 조선 국왕의 최후가 될 것이다. 나는 오늘 엄숙히 그가 최후를 맞게 되었음을 선포한다. 이제 수일 내로 우리 군대는 조선 정복을 위해 떠날 것이다.
- 주청 프랑스 대리 공사 벨로네의 조선 원정 보고서
규장각 | 인천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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