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Ⅶ. 개화와 자주 운동
  • 1. 흥선 대원군의 정치
  • [2] 흥선 대원군이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거부한 까닭은?
  • 신미양요와 척화비

신미양요와 척화비

병인양요에 앞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가까이 다가온 적이 있었다. 이 배에 탄 서양 사람들이 통상을 요구하자, 관리들은 외국과의 통상을 나라에서 금지하고 있다고 말하며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오히려 배에서 내려 민가를 약탈하고 관리를 잡아 가두는 등 행패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의 관민은 제너럴 셔먼 호를 불살라버렸다.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미국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였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1871). 프랑스군을 격퇴한 후,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여 강화도의 경비를 튼튼히 하고 있던 조선 정부는 이에 맞섰으며, 어재연이 이끈 조선군은 광성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한때 광성보를 점령하였던 미군은 조선 군민의 강력한 저항에 버티지 못하고 물러갔다.

이와 같이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조선 정부는 서양과의 통상 수교를 반대하는 정책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한편, 메이지 유신을 통해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춘 일본도 통상 수교를 요구해 왔으나, 그 외교 문서에 일본 국왕이 조선 국왕을 낮추어 보는 표현과 종래의 외교 관행에 어긋나는 내용이 있어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였다.

서양과 일본에 대한 조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우리 나라가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늦어지게 한 문제점도 있으나,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 한 자주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광성보 돈대 | 인천 강화
초지진 | 인천 강화
척화비 | 서울 마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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