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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Ⅹ. 대한민국의 발전
  • 1.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 [2]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과정은?
  • 남북 분단

남북 분단

우리 민족은 감격적인 광복을 곧바로 독립으로 이어 가지 못했다. 그것은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북위 38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설정하는 데 합의하고, 우리 나라의 남과 북에 각각 자기 나라의 군대를 진주시켰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소련군의 북한 진주에 이어 미국군도 9월 초 남한에 진주하여,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였다. 38도선은 이처럼 처음에는 미⋅소 양국에 의해 그어진 단순한 군사적인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 진영의 대립이 심해지고, 두 진영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38도선은 점차 정치적인 분할선으로 바뀌어 갔다.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토의 분단이라는 뜻밖의 시련을 겪게 되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국군은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미군정하에서 남한은 정국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혼란을 거듭하였다. 그것은 미국군이 한반도의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수많은 정당과 사회단체들이 난립하였고,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이 날카롭게 대립하였기 때문이었다.

북한에도 여러 정치 세력이 등장하였다. 그 중에서도 조만식 등 민족주의 세력과 중국이나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소련군은 공산주의 정권 수립을 위해 민족주의 세력을 제거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북한에는 공산주의 제도가 도입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신의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반공 의거가 일어났으며, 민족주의 계열의 지도자들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왔다. 공산주의 체제에 반대하는 많은 주민들도 자유를 찾아 38도선을 넘어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 없이 그어진 38도선으로 인해 한반도의 남과 북에는 각각 다른 이념과 제도가 도입되었다. 남한에는 자유 민주주의가, 북한에는 공산주의 체제가 각각 들어선 것이다.

얄타 회담

1945년 2월에 미국, 영국, 소련의 지도자들이 크림 반도의 얄타에서 소련군의 대일 참전과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

신의주 반공 의거

1945년 11월 23일에 일어난 학생 의거로 ‘공산당을 몰아 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남북 분단을 알리는 38도선 푯말 | 강원 양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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