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7차 교육과정
  • 중학교 국사 7차
  • Ⅹ. 대한민국의 발전
  • 1.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 [3] 6⋅25 전쟁의 원인과 그 영향은?
  • 북한의 남침

북한의 남침

북한은 남침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겉으로는 남한에 대해 평화 공세를 펴며 남침 의도를 숨기다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38도선 전 지역에 걸쳐 남침을 감행하였다.

우리의 국군은 빈약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자유 수호의 결의를 다짐하면서 북한 공산군의 침략에 맞서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국군은 공산군의 대규모 남침에 일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정부는 공산군의 남침을 피해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피란하여, 이 곳을 임시 수도로 하였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나이 어린 학도병들도 자유 수호를 위해 책 대신 총을 들고 국군과 함께 용감히 싸웠으며, 많은 청년들이 군에 지원하여 조국 수호에 앞장섰다.

북한 공산군의 침략이 있자, 긴급 소집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공산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한편, 유엔군의 한국 파병을 결의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반격을 시도하여 1950년 9월 28일에는 서울을 수복하였고, 이 기회에 통일을 이룩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산군을 쫓으며 북한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진격하여 통일이 눈앞에 다가온 듯하였으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군은 수많은 군대를 동원하여 인해 전술로 밀고 내려왔다. 그리하여 한때 서울을 다시 내주었으나, 전력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재탈환하고, 다시 38도선 부근까지 적을 몰아내었다. 그 후,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휴전 회담이 성립되어 휴전이 이루어 졌다(1953. 7.).

유엔 참전국(16개국)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캐나다, 뉴질랜드, 프랑스, 필리핀, 터키, 타이,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전쟁으로 파괴된 가옥
6⋅25 전쟁의 정황
국군과 유엔군의 축하 행진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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