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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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2장 삼국의 전성 시대
  • 제2절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의 정치

제2절 신라(新羅)와 백제(百濟)의 정치

신라의 유리왕(儒理王)은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관제(官制)를 정하였으며, 홀아비와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이[鰥寡孤獨]들을 위문하고 빈궁한 백성을 구휼하였다. 부왕(父王)인 남해왕(南解王)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매부(妹夫)인 석탈해(昔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파사왕(婆娑王)은 병기(兵器)와 성곽을 보수하고,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공손함과 검소함을 숭상하였으니, 백제 등 여러 나라가 신라를 외경하였다. 일성왕(逸聖王)은 정사당(政事堂)을 설치하고 제방을 보수하였으며, 농지를 개척하고 민간의 사치를 금지하였다. 벌휴왕(伐休王)은 사람들의 삿됨과 바름을 잘 분별하여 어진 인재를 발탁하고 기용하였으니, 세상 사람이 ‘성왕(聖王)’이라고 칭하였다. 조분왕(助賁王)의 시대에는 골벌국(骨伐國)【지금의 영천(永川)】이 스스로 와서 항복하였고, 감문국(甘文國)【지금의 개령(開寧)1)현재의 경상북도 김천(金泉)의 옛 지명이다.을 토벌하여 군현(郡縣)을 설치하였다. 첨해왕(沾解王)은 하량벌(河梁伐)【지금의 상주(尙州)】를 멸망시켰다.

김미추(金味鄒) 왕이 즉위하였는데, 미추왕은 조분왕의 사위로서 어질고 바른 정치[德政]를 폈으므로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며 떠받들었다. 소지왕(炤知王)2)원문에는 소지왕(炤智王)으로 되어 있으나, 소지왕(炤知王)으로 바로잡는다.의 시대에는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또 시전[市肆]을 설치하여 물품과 재화가 유통되게 하였다. 지증왕(智證王)의 시대에는 순장(殉葬)을 금지하고 주군(州郡)에 명하여 처음으로 소를 이용하여 밭을 갈게 하였으며, 이찬(伊飡) 이사부(異斯夫)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울릉도(鬱陵島)】을 정복하게 하고 시호(諡號)를 붙이는 법을 정하였다. 법흥왕(法興王)의 시대에는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관제(官制)를 정하였다. 진흥왕(眞興王)의 시대에는 모든 제도에 볼만한 것이 많았고, 진평왕(眞平王)의 시대에는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기강이 더욱 정연해졌다.

백제의 개루왕(蓋婁王)은 음탕한 음악을 좋아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으니 나라 안에 굶주리는 백성들이 고구려(高句麗)로 떠돌아 갔으며, 말갈(靺鞨)과 낙랑(樂浪)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니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졌다. 고이왕(古爾王)의 시대에는 뇌물을 받지 못하게 하는 법률[犯贓律]을 제정하여 관리로서 부정하게 재물을 받기를 탐하는 자들에 대하여 받은 뇌물의 3배를 징수하고 평생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였으며, 관직과 관복의 색을 제정하였다. 책계왕(責稽王)은 맥(貊)의 병사에게 피살당하였다. 분서왕(汾西王)은 낙랑의 태수(太守)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비류왕(比流王)의 시대에는 기근이 들어 백성의 삶이 곤궁해졌다. 개로왕(蓋鹵王)의 시대에는 지나(支那)의 위(魏)나라와 통교(通交)하였다. 문주왕(文周王)의 시대에는 탐라(耽羅, 제주도(濟州道)의 옛 이름)가 토산물을 바쳤으며,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겼다. 동성왕(東城王)은 임류각(臨流閣)을 건설하고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을 팠으며, 궁궐의 문을 닫아 걸고 바른 말로 간언하는 자들을 멀리하였다가 신하인 백가(苩加)3)원문에는 작가(芍加)로 되어 있으나, 백가(苩加)로 바로잡는다.에게 피살당하였다. 무령왕(武寧王)은 말갈족을 격퇴하였다. 성왕(聖王)은 사비(泗沘)4)원문에는 사차(泗泚)로 되어 있으나, 사비(泗沘)로 바로잡는다.【지금의 부여(扶餘)】로 도읍을 옮겨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라고 하였다. 백제는 수백 년을 이어 오는 동안에 내정을 돌보지 않고 신라⋅고구려⋅말갈⋅낙랑 등과 서로 다투며 싸움만을 일삼아 백성들을 곤궁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국력이 피폐하여 졌으니, 그 정치에 볼만한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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