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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천개소문(泉蓋蘇文)의 위대한 업적

고구려(高句麗)의 영양왕(嬰陽王)이 말갈(靺鞨)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지나(支那) 수(隋)나라의 요서(遼西) 지역을 여러 차례 침공하자 수나라 왕[主] 양견(楊堅)이 크게 노하여 유관(楡關)1)중국 내부와 동북 지방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상의 관문인 산해관(山海關)의 다른 이름이다.을 넘어 출병하였다. 그러나 식량이 떨어져서 퇴각하자 양견의 아들 양광(楊廣)이 고구려에 국서(國書)를 보내어 항복하라고 위협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양광이 노여워하며 130만 명의 대군을 일으켜 직접 침공하면서 외치기를 200만 대군이라 하고 9갈래로 길을 나누어 침입하니, 깃발이 960리를 뒤덮고 북과 나발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양광이 요동성(遼東城)【지금의 성경성(盛京省) 요양주(遼陽州)】을 포위하고 여러 군대를 압록강(鴨綠江) 서쪽에 집합시키자 고구려의 대신(大臣) 을지문덕이 나가서 방어하였는데, 혼자서 적군의 진영으로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여 적들의 약점을 살폈다. 이에 수나라 대장(大將) 우중문(于仲文)2)원문에는 우중문(宇仲文)으로 되어 있으나, 우중문(于仲文)으로 바로잡는다.이 그를 붙잡으려고 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고 대장 우문술(宇文述) 등과 함께 추격하여 왔다. 을지문덕이 우문술 군대가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보고는 그들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7번이나 싸우다가 달아나면서 적군을 살수(薩水)의 남쪽으로 유인하였는데, 평양(平壤)과의 거리가 불과 30리였다.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말하기를, “만일 공 등이 군사를 돌린다면, 내가 항복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우문술 등이 자신들의 군대가 피폐하다는 점과 평양성의 지형이 험하고 수비가 튼튼함을 보고는 곧 군대를 돌려 퇴각하였다. 이에 을지문덕이 정예 병사를 보내어 사방에서 습격하여 쳐부수었으며, 살수에 이르러서는 적군이 절반 정도 강을 건너간 틈을 타서 그 후미를 쳐서 크게 이기고, 후군(後軍)을 거느리고 가던 장수 신세웅(辛世雄)의 목을 쳤다. 적군의 진영이 모두 무너지고 흩어져 하루 밤낮이 걸려 압록강에 이르렀으니, 도망쳐 간 거리가 무릇 450리였다. 이때는 우리의 단군 기원후 2945년(612)으로 지금으로부터 1298년3)원문에는 1299년으로 되어 있으나, 살수 대첩은 612년의 일이므로 1298년으로 바로잡는다.【융희(隆熙) 4년(1910)을 기준으로 계산한다.】 전이었으며, 고구려 영양왕 23년 가을 7월이었다.

이보다 앞서 수나라의 장수 내호아(來護兒)가 따로 강회(江淮) 일대의 수군을 거느리고 패수(浿水)4)패수는 고조선 시기에 요동과 경계를 이루던 강으로 압록강이나 청천강, 또는 요서 지방의 대릉하(大凌河)로 비정하는 설이 제시되어 있다. 또한 평양 부근을 흐르는 대동강의 옛 이름이기도 하다.를 건너 평양에 이르렀다가 을지문덕의 후군에 의해 크게 패하고 돌아갔다. 처음에 수나라 군사로서 요동에 이른 자가 1백만 5천 명이었으나,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2천 7백 명에 불과하였으며, 또한 군량(軍糧)과 병장기를 크게 잃거나 탕진하였으니, 수천 년 이래로 보기 드문 큰 전쟁이었다. 을지문덕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굳세며 지략이 있었고, 외교와 군사 전략에 뛰어나 토끼가 내달리고 송골매가 떨어지는 듯[兎起鶻落]하고 귀신같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神出鬼沒] 방법으로 100만 명의 적군을 모기나 등에와 같이 보고 쇠뭉치같이 굳센 주먹으로 짓밟아 푸른 강의 물귀신이 되게 하였으니, 실로 우리 대동(大東)의 4000년 역사에서 제1의 인물이라 하겠다.

수나라 왕 양광이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에 대군을 친히 거느리고 요동성을 침공하여 왔는데, 20여 일 만에 힘이 다하여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 또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서신을 받자 양광이 크게 두려워하여 군대를 퇴각시켰다. 그 후에 다시 침공하고자 하여 회원진(懷遠鎭)까지 이르렀다가 고구려가 방비하고 있음을 알고는 퇴각하였다.

영양왕이 돌아가시고 그의 배다른 형제인 영류왕(榮留王)이 즉위하였는데, 이때 수나라는 멸망하고 당(唐)나라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으며, 당나라 왕[唐主] 이연(李淵)이 사신을 보내 살수【지금의 청천강(淸川江)】 전투에서 사로잡은 포로를 교환하고 화친을 맺었다. 이후에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은 은밀히 침범할 뜻을 지니고 있었는데, 마침 천개【‘합(合)’으로 발음한다】소문이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寶藏王)을 세우자 당나라의 사신 장엄(蔣儼)이 와서 황제의 서신을 전하기를, “당나라가 신라(新羅)와 통교(通交)하는 길을 막지 말고, 또 백제(百濟)와 신라로부터 각각 군사를 거두어 들이라. 그렇지 않으면 곧 군사를 일으켜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천개소문5)고구려의 장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중국 당나라 고조(高祖)의 이름이 연(淵)이었기 때문에 이를 피휘(避諱)하여 천개소문이라고 한 것이다.이 말하기를, “예전에 수나라의 군사가 우리를 침공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땅 500리를 빼앗았으니, 지금 그 땅을 되찾지 않는다면 전쟁을 멈출 수가 없다.”라고 하고 곧 장엄을 굴실(窟室)에 가두었다. 이에 당나라 왕이 노여워하며 대군 40만 명을 직접 이끌고 침공하여 왔으며, 신라와 백제, 해(奚)【내몽고(內蒙古)의 동남부 경계 지역】, 거란[契丹]【직례성(直隷省) 동쪽 경계 지역】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략하게 하였다. 더불어 대총관(大摠管) 이세적(李世勣) 등은 요수(遼水)를 건너고, 대총관 장양(張亮) 등은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비하성(卑河城)【성경성(盛京省) 해양현(海陽縣)에 있다.】을 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세민이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수나라가 고구려에게 4차례나 패배한 수치를 설욕하리라.” 하고는 활과 화살을 직접 들고 요수의 되돌아갈 다리를 끊어 버림으로써 죽음을 무릅쓴 의지를 보였다. 요동성을 포위한 후 그 성벽 아래에 이르러 이세민이 직접 흙을 짊어지고 가서 해자(垓字)를 메꾸었다. 성을 포위한 지 13일 만에 당나라 군사들의 출격을 알리는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으니, 이 전투에서 죽은 고구려 병사와 당나라 병사가 모두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군대가 또 요서성과 백암성(白巖城) 두 성을 함락하고 안시성(安市城)을 침공하여 오자 고구려 북부(北部)의 고연수(高延壽)와 남부(南部)의 고혜진(高惠眞)이 와서 이를 구원하면서 말갈의 군사 15만 명과 힘을 합치니, 그 진영의 형세가 40리에 걸쳐 잇따랐다. 이세민이 이를 멀리서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감히 맞서 싸우지 못하고는 간사한 꾀를 내어 고연수를 속여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천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함이니, 다른 의도는 없다.”라고 하자 고연수가 그 말을 믿고 침공에 대비를 하지 않았다. 당나라 왕이 이세적으로 하여금 서산령에 군사를 매복하게 하고 다시 소수의 군대로 하여금 고연수를 유인하였다. 고연수가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의 간언을 따르지 않고 진격하였다가 그 계략에 빠져 당나라 군대를 추격하였는데, 이때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갑자기 튀어나와 말을 내달려 돌격하여 오니 이에 고구려 병사들이 패배하였다. 이세민이 이 승세를 타고 안시성을 포위하자 성주(城主) 양만춘(楊萬春)이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키면서 이세민의 눈을 활로 쏘아 맞추자 당나라 병사들이 동요하여 어지러워졌다. 이때 양만춘이 날랜 기병을 내보내 좌우에서 돌격하니, 이세민이 크게 패배하여 병사를 퇴각시켰는데 그 군사 중에 살아서 돌아간 자는 겨우 1천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죽은 말도 또한 10중 7⋅8이나 되었다. 이때가 단군(檀君) 기원후 2978년(645)이었다.

이세민이 패배하고 돌아온 후에 분통함을 이기지 못하다가 마침내 그 울분으로 죽었다. 이에 천개소문이 더욱 당나라를 깔보자 당나라가 여러 차례 군사 일부를 보내어 고구려의 영토를 침범하고, 또 큰 나무를 베어서 함선(艦船)을 만들었는데, 이는 앞서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육군이 승리하지 못하였으므로 이제 수로를 통하여 공격하고자 한 것이었다.

천개소문은 용모가 웅장하고 장대하였으며, 성품이 난폭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굴복하였다. 항상 용광(龍光)이 하늘까지 뻗치는 5개의 큰 칼을 차고 지나(支那)의 큰 판국을 곁눈질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군마(軍馬)를 기르다가 당나라 태종의 40만 병사를 한 칼에 섬멸하여 지나(支那)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그치게 하였으니, 큰 영웅의 기개는 100세대가 지난 이후에도 여전히 늠름하여 후대의 사람들로 하여금 떨쳐 일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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