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8장 발해(渤海)의 강성

제8장 발해(渤海)의 강성

발해는 만주(滿洲)에 있던 나라로서 속말(粟末)【속말하(粟末河)이니 곧 송화강(松花江)】 말갈(靺鞨)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고구려(高句麗) 유민의 나라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남은 무리인 걸걸중상(乞乞仲象)과 걸사비우(乞四比羽) 등이 백두산(白頭山) 동북 지역에 있는 오루하(奧婁河)에 자리를 잡고 발해국을 창건하였다. 단기 3046년(713)에 걸걸중상의 아들인 대조영(大祚榮)이 즉위하여 나라 이름을 진국(震國)이라고 하였다가 그 후에 발해로 바꾸어 불렀다1)원문에는 단기 3047년으로 되어 있으나, 대조영이 오루하 유역의 동모산에서 진국을 세운 시기는 단기 3031년(698)이며, 이후 단기 3046년(713)에 당나라의 책봉을 받으면서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하였으므로 3046년으로 바로잡는다. 한편, 당나라의 책봉 이전에는 진국이라 하였다가 책봉 이후에 발해라고 칭하였다는 것은 중국 측의 기록에 의한 것이므로 근래에는 이 기사의 의미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 국력이 점점 강성해져서 무예왕(武藝王)과 익수왕(益秀王)은 영토를 더욱 넓혔으니, 그 땅이 남쪽으로는 신라(新羅)와 이웃하였고, 동쪽으로는 바다에 닿았으며, 서쪽으로는 거란[契丹]과 인접하였으며 5경(京) 15부(府) 62주(州)를 설치하였다. 또 숙신(肅愼)의 옛 땅을 상경(上京)으로 삼았는데, 여기는 곧 용정부(龍井府)【지금의 북간도(北間島) 용정촌(龍井村)】이니, 대조영이 목책(木柵)을 세웠던 곳으로서 백두산 동남쪽 동모산(東牟山)【지금의 모우산(牟隅山)】 아래에 있다. 그 남쪽은 중경(中京)으로서 현덕부(顯德府)라고 하며, 예(濊)2)원문에는 예(穢)로 되어 있으나, 예(濊)로 바로잡는다.⋅맥(貊)의 옛 땅은 동경(東京)이니 용원부(龍原府)이다. 옥저(沃沮)의 옛 땅은 남경(南京)으로서 남해부(南海府)라고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은 서경(西京)으로서 압록부(鴨綠府)라고 하였다. 부가 또 각각 주를 거느렸으니, 엄연한 하나의 대국(大國)을 이루어 지금의 만주 전역을 모두 차지하였다. 무예왕의 시대에는 당(唐)나라의 등주(登州)를 침공하였는데,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장수 김윤중(金允中) 등과 연합하여 공격해 오자 이를 격파하였고, 영원장군(寧遠將軍)3)원문에는 솔원장군(率遠將軍)으로 되어 있으나, 영원장군(寧遠將軍)으로 바로잡는다. 고인의(高仁義)를 일본(日本)에 보내 화호(和好)를 맺었으며, 여러 유생을 지나(支那)의 당나라에 보내어 문물 제도를 배우게 하였다. 정부는 선조성(宣詔省)과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 좌(左)⋅우상(右相)과 좌(左)⋅우평장(右平章) 등으로 구성되었고, 무관(武官)으로는 좌(左)⋅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등이 있었다. 관료의 복장으로는 자색(紫色)⋅비색(緋色)과 천비색(淺緋色)과 녹색(綠色)에 상아로 만든 홀(笏)과 금⋅은 어대(魚袋)의 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발해는 그 국세(國勢)가 한 시대를 뒤흔들었으나, 단기 3259년(926)4)원문에는 3261년으로 되어 있으나,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발해를 침공하여 멸망시킨 해는 926년으로서 단기 3259년에 해당하므로 바로잡는다. 신라 경애왕(景哀王) 때에 거란의 태조(太祖) 아보기(阿保機)가 침범하여 부여성(扶餘城)을 함락하고 홀한성(忽汗城)【길림성(吉林省)】을 에워싸자 발해 왕 대인선(大諲譔)이 항복하였다. 이에 아보기가 발해를 동거란[東丹國]으로 고쳐 부르고, 자신의 아들 돌욕(突欲)으로 하여금 이곳을 평정하게 하였다. 이로써 발해가 멸망하였으니, 지나온 왕대(王代)가 14대이며, 햇수로는 214년이었다. 발해의 태자(太子) 대광현(大光顯)5)원문에는 광대현(光大顯)으로 되어 있으나, 대광현(大光顯)으로 바로잡는다.과 장군 신덕(申德)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고려(高麗)에 투항한 것이 전후로 수만 호(戶)에 달하였으며, 고려의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것을 노여워하여 거란을 정벌하러 가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으로서 조국 고구려가 멸망한 것을 분하게 여겨 만주 전  지역을 차지하고, 동아시아의 큰 형국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 북쪽으로는 당나라를 격파하고, 남쪽으로는 신라의 침공을 막아 냄으로써 부여족(扶餘族)이 3000년 동안 누려 왔던 옛 터전을 보전하였다. 그러나 천운이 불행하여 하루아침에 거란에게 멸망당하게 되었는데도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움직이게 할 만한 대장부[大男兒]가 나타나지 않아 5천여 리에 이르는 강역을 이민족에게 넘겨 주게 되었으니, 100세대가 지난 후의 영웅들로 하여금 슬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