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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장 신라의 쇠망(衰亡)

제9장 신라의 쇠망(衰亡)

신라(新羅)가 통일한 후로 100여 년이 지나도록 나라에 큰 위기가 없다가 혜공왕(惠恭王)의 시대에 이르러 왕이 음악과 여색에 깊이 빠져서 즐기고 희롱함이 도를 넘어섰으며, 기강이 문란하여져서 인심이 등을 돌렸다. 이에 김지정(金志貞)이 무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자 김양상(金良相)이 김지정을 주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으니, 이가 선덕왕(宣德王)이다. 애장왕(哀莊王)의 시대에는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헌덕왕(憲德王)이 되었다. 또 김명(金明)이 희강왕(僖康王)을 시해하자 김양(金陽)이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청해진(淸海鎭)【지금의 완도(莞島)】에서 병사를 일으켰다. 이때에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가 병사 5천 명을 그 친구인 정연(鄭年)에게 주어서 김양을 돕게 하니, 김양이 밤낮으로 행군하여 달벌구(達伐丘)【지금의 대구(大丘)】에서 김명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달아나는 무리를 추격하여 가서 목을 벤 후에 신무왕(神武王) 김우징(金祐徵)을 맞아들여 즉위시켰다.

문성왕(文聖王) 이후로는 반역이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그 주모자를 모두 주살하였다. 대체로 이 당시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노닐면서 음악과 시부(詩賦)를 이야기하며 서로 칭찬할 뿐 삼가고 두려워함이 없어서 겉으로는 평안하여 보였으나, 안으로는 모두 부패하였다. 진성 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함에 이르러서는 왕이 음탕하고 문란하여 어리고 잘생긴 남자들과 몰래 사통하고 이로 인하여 그들에게 요직을 제수하였으니, 아첨하여 총애를 얻는 자들이 그 뜻을 이루어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또 주군(州郡)에서는 세금[貢賦]을 납부하지 않아 나라의 곳간이 고갈되었고, 곳곳에서 도적떼가 일어났으니 원종(元宗)과 애노(哀奴)1)원문에는 쇠노(衰奴)로 되어 있으나, 애노(哀奴)로 바로잡는다. 등은 사벌주(沙伐州)【지금의 상주(尙州)】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양길(梁吉)과 궁예(弓裔)는 북원(北原)【지금의 원주(原州)】에서 모반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完山)【지금의 전주(全州)】에서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사방이 어지럽고 강역이 날로 줄어들어 신라의 국운(國運)은 실과 같이 가늘게 겨우 유지될 뿐이었다.

경애왕(景哀王)의 시대에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이 갑자기 신라의 왕도(王都)에 침입하자 왕이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며 놀다가 황급히 부인과 함께 성 남쪽의 이궁(離宮)으로 도망가 숨었다. 그러나 견훤이 왕을 찾아내어 강제로 자결하게 하고, 왕후를 겁탈하여 욕을 보였으며, 왕의 사촌동생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또 전왕(前王)의 동생인 효렴(孝廉)과 재신(宰臣) 경영(景英)을 사로잡고 남녀의 백성들과 각종 장인(匠人), 병장기(兵仗器)와 진귀한 보물을 빼앗아 돌아오니, 신라의 국세가 더욱 미약해졌다. 이에 신라 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고자 하였는데, 이때 왕자가 홀로 반대하며 말하기를, “국가의 보존과 멸망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는 것이니, 마땅히 충신(忠臣)과 의로운 자[義士]들을 규합하여 죽을 각오로 지키다가 힘이 다하면 그뿐입니다. 어찌 1000년의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에게 가벼이 주어 버리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사직하고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서 평생토록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 먹으며 살다가 죽었다.

왕이 고려에 항복함으로써 신라는 멸망하였으니, 거쳐 온 왕대(王代)가 56대이며, 이어져 온 햇수가 992년이었고, 문무왕(文武王)이 통일한 때로부터 268년 후였다. 이때는 단기 3268년(935)2)원문에는 3267년으로 되어 있으나, 경순왕이 고려에 귀부한 해는 935년이므로 3268년으로 바로잡는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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