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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0장 태봉(泰封)과 후백제(後百濟)

제10장 태봉(泰封)과 후백제(後百濟)

신라(新羅) 진성 여왕(眞聖女王)의 시대에 많은 영웅이 나타났는데, 그중 세력이 가장 큰 자는 궁예(弓裔)1)원문에는 궁율(弓矞)로 되어 있으나, 궁예(弓裔)로 바로잡으며, 이후로 나오는 궁율은 모두 궁예로 수정한다.와 견훤(甄萱)이었다. 궁예는 신라 헌안왕(憲安王)의 아들로서 담력이 있었는데, 신라가 쇠약하고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북원(北原)의 도적 양길(梁吉)에게 투항하였다가 후에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하며 사방을 공략하여 차지하였다. 또 양길과 싸워 격파하자 왕이라고 칭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였으며, 철원(鐵原)에 도읍을 정하였다. 각종 관직[百官]을 설치하고 왕건(王建)을 등용하니 여러 주에서 그 위세를 보고 스스로 귀부하여 왔으며, 병사와 군마가 점점 더 강성해지고 토지가 넓어져서 전국의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에 궁예가 교만해져서 자칭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면서 포학하고 도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였으며, 자신의 부인 강씨(康氏)를 잔인하게 죽이고 장수와 신하들을 죽이거나 해를 입히자 인심이 등을 돌렸다. 이에 궁예의 부하인 장수 왕건을 추대하여 왕으로 세우고 나라 이름을 고려(高麗)라고 하니, 궁예가 이를 듣고 크게 놀라 부양(斧壤)【지금의 춘천(春川)】으로 달아났다가 백성들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으니, 궁예가 왕을 칭한 지 17년 만에 망한 것이다.

견훤은 상주(尙州) 농민의 아들로서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며 지략이 뛰어났다. 신라가 쇠약해져서 도적떼가 일어나자 견훤이 반역할 마음을 몰래 품고 신라 조정에서 망명해 나온 이들을 불러 모으니 약 한 달 만에 무리가 5천 명이나 되었다. 이에 무진주(武珍州)【지금의 광주(光州)】를 습격하여 점거한 후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고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고 하였으며, 완산(完山)에 도읍을 정하였다. 관직을 설치하고 지나(支那)의 오(吳)⋅월(越) 및 후당(後唐)과 교류하며 화친을 맺었으며, 고려와도 화호(和好)를 맺었다. 그러나 견훤이 신라를 공격하였을 때에 고려가 신라를 구원하고자 하여 견훤과 대치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서로 멀어졌다. 마침내 서로 볼모를 교환함으로써 화친 맺기를 요청하였는데, 견훤의 외생(外甥)2)처의 형제 혹은 시집간 여동생이 낳은 사내아이를 말한다.인 진호(眞虎)가 고려에 볼모로 갔다가 병으로 죽었다. 견훤은 그가 피살된 것으로 의심하여 고려의 볼모인 왕신(王信)을 죽이고 여러 차례 고려를 침공하였으며, 신라를 공격하여 왕을 시해하였다. 견훤이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총애하여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자 첫째 아들인 신검(神劍)이 견훤을 금산사(金山寺)에 깊이 가두고 금강을 죽였으며,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이에 견훤이 몰래 도망쳐서 고려에 이르니 왕이 후한 예로써 그를 대우하고, 대군을 일으켜서 신검을 일선(一善)【지금의 선산(善山)】에서 격파하였다. 마침내 신검이 항복함으로써 후백제가 멸망하였으니, 견훤이 나라를 세운 지 45년 만이며, 신라가 망한 지 1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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