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1장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창업(創業)

제11장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창업(創業)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재주와 도량이 크고 깊었으며, 음성이 우렁차고, 세상을 구제할 큰 뜻을 지니고 있었다. 후에 궁예(弓裔)의 장수가 되어 광주(廣州)⋅충주(忠州)⋅당성(唐城)【지금의 남양(南陽)】⋅청주(菁州)【지금의 진주(晋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槐山)】 등의 군(郡)을 함락시켰으며, 견훤(甄萱)을 상주(尙州)에서 격파하고 진도(珍島)를 공략하였다. 또 백선 장군(百船將軍)이 되어 나주(羅州)를 편안하게 해 주었으므로, 견훤과 해상의 여러 도적 무리가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였으며, 사졸(士卒)들을 위무하고 사랑하여 그 위엄과 은혜가 두루 미치니 인심이 귀부하여 왔다. 궁예의 포학함이 날로 심해지자 장군 홍유(洪儒)⋅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1)원문에는 배현경(裴玄慶)으로 되어 있으나, 배현경(裵玄慶)으로 바로잡는다. 등이 왕건을 추대하고자 하였다. 왕건이 굳이 사양하자 그의 부인 유씨(柳氏)가 말하기를, “의로움을 들어 포학한 자를 정벌하는 것은 예부터 그러했던 일입니다. 지금 여러 장수의 말을 들어 보니, 첩(妾)도 오히려 떨쳐 일어나겠거늘 하물며 대장부이지 않습니까.”라고 하고는 직접 갑옷을 가지고 와서 왕건에게 입혔다. 이에 여러 장수가 그를 에워싸고 나와서 왕위에 오르게 하니, 이때가 단기 3251년(918)2)원문에는 3355년으로 되어 있으나, 왕건이 신숭겸 등의 추대를 받아 즉위한 때는 918년 6월로서 단기로는 3251년에 해당되며, 단기 3355년은 고려 7대 왕인 현종(顯宗) 13년(1022)이므로 3251년으로 바로잡는다.이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니, 산이 높고 물이 곱다[山高水麗]는 뜻을 취한 것이다. 연호(年號)를 세워 천수(天授)라고 하고, 송악(松嶽)3)원문에는 송악(松岳)으로 되어 있으나, 송악(松嶽)으로 바로잡는다.에 도읍을 정하였으며, 관제(官制)를 정하고 궁궐을 창건하였다. 여러 신하의 공훈을 살펴 포상을 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으며, 6위(衛)를 설치하니 이로써 건국의 기초가 대략 정하여졌다. 이듬해에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후백제(後百濟)의 연산진(燕山鎭)을 쳐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임존성(任存城)【지금의 대흥(大興)】을 공략하여 3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으니, 견훤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맺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견훤이 신라(新羅)에 침입하여 신라 왕을 죽이자 고려 왕이 직접 정예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견훤을 공산(公山)【지금의 대구(大丘)】에서 만나 싸우다가 견훤의 병사들에게 포위당하여 상황이 매우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에 대장 신숭겸이 왕의 수레에 대신 올라타서 장군 김락(金樂)과 더불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전사하였으며, 왕은 이 틈을 타서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듬해에 왕이 또 고창군(古昌郡)【지금의 안동(安東)】에서 견훤을 크게 격파하여 8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30여 성의 항복을 받아 냈다. 서경(西京)에 학교를 창설하여 6부의 학생들을 가르치고, 신라 경순왕(敬順王)을 가서 만나보았다. 또 유금필로 하여금 후백제 연주(運州)【지금의 홍주(洪州)】를 공략하게 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3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이후 신라 왕이 와서 항복하자 신라의 옛 땅을 모두 병합하였고, 견훤의 아들 신검(神劍)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음으로써 후백제를 모두 평정하고 통일의 업을 이루었다. 이때가 단기 3269년(936)이었으며, 태조가 고려 왕에 즉위한 지 19년 만이었다.

이에 태조는 신하와 자식들에게 절의(節義)를 독려하기 위하여 『정계(政誡)』 1권과 『백료계(百僚誡)』4)왕건이 신하의 예절을 밝히기 위하여 『정계』와 더불어 직접 저술하여 반포한 『계백료서(誡百僚書)』를 가리킨다. 8편을 지어서 조정 안팎에 반포하고, 공신각(功臣閣)을 건립하여 삼한 공신(三韓功臣)5)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직후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내려준 공신호(功臣號)이다.의 초상을 동쪽과 서쪽 벽에 그려 놓았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