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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2장 고려의 정치와 내란(內亂)

제12장 고려의 정치와 내란(內亂)

혜종(惠宗)이 돌아가시자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국상(國喪) 중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니, 대광 왕식렴(王式廉)이 그를 쳐서 목을 베었다. 광종(光宗)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제정하여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방면하게 하였으며, 바른 말[直言]을 하는 신하 서필(徐弼)의 간언을 잘 따랐으므로 초기의 정치는 볼만한 것이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참언(讒言)을 믿어서 나라에 공훈이 있는 신하들과 경험과 공로가 많은 장수들을 모두 죄를 물어 죽였으며, 시(詩)와 부(賦) 등 문장력으로 관리를 뽑는 과거법(科擧法)을 세움으로써 후대에 겉은 화려지만 내실은 없는 문장[虛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성행하게 되는 단초를 열었다. 경종(景宗)은 참언을 기록한 글을 모두 불태워 죄 없이 형벌을 받은 자들을 방면하였으며, 재주가 있으면서도 주요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자들을 발탁하고 조세(租稅)를 감면하였다. 또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여 백관(百官)에게 녹(祿)을 지급하니, 조정 안팎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러나 말년에는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을 일삼았으며, 어진 선비들을 멀리하고 소인배를 가까이하여 정치와 교화(敎化)가 쇠퇴하게 되었다. 대개 혜종 이후로 경종에 이르기까지 모두 4대(代)에 이르는 동안 나라의 갖가지 일들이 비로소 마련되었고, 그 사이에 임금이 덕망(德望)을 잃는 일도 종종 있었으므로 태조(太祖)가 이룬 대업을 겨우 보전하였을 뿐이었다.

성종(成宗)은 타고난 용모가 엄정(嚴正)하고 도량이 크고 너그러웠으며, 절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어진 인재를 널리 구하였으며, 백성들을 위무하고 구휼하였다. 세간의 풍속을 바꾸는 것을 중요한 임무로 삼아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건립하고 관제(官制)를 정하였으며, 신하들이 바른말을 올릴 수 있는 길을 열었다. 또한 최승로(崔承老)가 역대 임금들의 업적과 과실 및 당시 임금의 잘함과 잘못함에 대하여 강직하면서도 간절하게 논한 장문(長文)의 글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효자를 표창하고 지방의 수령(守令)들에게 힘써 백성들을 돌볼 것을 장려하였다. 주군(州郡)에는 학사(學舍)를 설립하고 전장(田莊)을 지급함으로써 문학을 장려하였다. 10도(道)【관내도(闕內道),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강남도(江南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를 정하고 12군(軍)의 제도를 마련하였으며, 추밀원(樞密院)을 설치하여 군사 기밀과 국가의 큰일을 의결하게 하니, 법도와 정치가 크게 성하였다. 이에 안으로는 백성들이 화목해지고, 밖으로는 거란[契丹]과 여진(女眞) 등을 축출하였으니, 성종은 진실로 고려(高麗) 500년 역사 가운데 제1의 성군(聖君)이었다.

성종이 돌아가시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그 모후(母后)인 천추 태후(千秋太后)가 섭정(攝政)을 할 때 천추 태후는 김치양(金致陽)과 몰래 사사로이 간통하면서 그로 하여금 국정을 좌우하게 하였다. 이때에 왕은 뒤를 이을 아들이 없었고, 태조의 자손으로는 오직 대량군(大良君) 왕순(王詢)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천추 태후는 대량군을 꺼리어 그를 해치고자 모의하는 한편, 김치양과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다. 때마침 왕이 병에 걸린 것을 보고 천추 태후의 모의가 더욱 급박하게 전개되었으므로 왕이 채충순(蔡忠順) 등을 불러서 말하기를, “짐(朕)은 병이 점점 위독하여져서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 태조의 혈통을 이은 후손은 오직 대량군뿐이니, 경(卿)은 최항(崔沆)과 함께 성심(誠心)을 다하여 사직을 보전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이에 채충순이 황보유의(皇甫愈義)로 하여금 왕순을 맞아 오게 하고, 서북 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를 궁궐로 불러들여 숙위하게 하였다.

그러나 강조는 무장한 군졸 5천 명을 거느리고 영추문(迎秋門)으로 돌격하여 들어와 도리어 왕을 폐위하여 양국군(讓國君)으로 강등하고, 대량군 왕순을 영접하여 즉위시켰으니, 이가 바로 현종(顯宗)이다. 강조는 김치양과 그 아들을 목베어 죽이고 천추 태후와 그 친속(親屬)인 주정(周楨) 등 30여 명을 섬으로 유배 보냈으며, 끝내 목종을 적성(積城)에서 시해하였다. 이에 모든 신료와 백성이 통분(痛忿)하였으나, 현종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도리어 강조를 이부 상서(吏部尙書)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삼고, 오직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팔관은 곧 불교에서 말하는 8가지 계율이다.】에 온 정성을 다하였다. 이후에 거란에서 강조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다스리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힐문하자 왕이 비로소 강조가 한 일을 알게 되었다.

아아, 요사스러운 아녀자가 정권을 농락하고 나라에 반역을 저지른 신하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는데도 임금은 심지어 알지 못하였고, 조정의 신하들은 아양을 떨며 아첨만을 일삼음으로써 성종이 이룬 위대한 정치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인심이 등을 돌렸다. 변경의 방비(防備)가 튼튼하지 못하여 끝내 거란이란 외적이 국경 지역을 함부로 넘나들어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의 고기와 같이 짓밟히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거의 다 위태로워지게 하였으니, 만일 위대한 영웅 강감찬(姜邯贊)이 세상에 나지 않았더라면 나라가 보존될지 멸망할지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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