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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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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절 여진(女眞)과의 관계와 윤관(尹瓘)의 정벌

제2절 여진(女眞)과의 관계와 윤관(尹瓘)의 정벌

여진은 고려(高麗)의 동북쪽에 위치하였으니, 지금의 함경도 동북 변경 지역과 만주(滿洲)의 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 두 곳에 걸친 지역이다. 이들은 곧 말갈(靺鞨)의 후예로 흑룡강 동쪽에 거주하는 이들을 동여진(東女眞)이라고 하며, 그 서쪽에 있는 이들을 서여진(西女眞)이라고 하였다. 정종(定宗) 때에는 동여진이 말 700필(匹)과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바쳤다. 성종(成宗) 때에는 압록강(鴨綠江) 바깥에 있는 여진족을 백두산(白頭山) 바깥으로 축출하고 서희(徐熙)를 보내어 장흥진(長興鎭)⋅귀화진(歸化鎭) 두 곳과 곽주(郭州)⋅귀주(龜州)에 성을 쌓았다. 덕종(德宗) 때에 동여진이 와서 조회(朝會)에 참렬하고 말을 바쳤다. 문종(文宗) 때에는 동여진의 추장(酋長) 15명이 귀부하여 와서 군현(郡縣)에 편입되고 서여진도 또한 귀부하여 왔다. 숙종(肅宗) 때에는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와 오아속(烏雅束)이 잇따라 강성해졌으나 고려는 자신들의 선조가 배출된 나라라고 하면서 신하로서 복종하여 매우 삼가하였다. 이는 오아속의 5대(代) 조상인 김준(金俊)이 본래 고구려(高句麗) 평주(平州)의 승려로서 여진에 들어가 추장이 되었으며, 여진이 본래 고구려의 부락(部落)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 뜻밖에도 여진족 내부의 변란으로 인해 기병(騎兵)을 일으켜 정주(定州) 밖에 이르렀는데, 변방의 관리가 이들이 반란을 꾀한다고 칭하면서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에 숙종이 임간(林幹) 등으로 하여금 정벌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다시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가 또다시 패배하자 왕이 분노하여 종묘(宗廟)에 고하고 병사를 일으키려고 하다가 돌아가셨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여 정치에 힘써 관리들의 공과(功過)를 조사하여 상벌을 내리는 제도[考課]를 시행하고, 신하들이 직언(直言)을 올리기를 구하는 한편, 선왕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인 단기 3440년(1107)에 윤관을 원수(元帥)로 임명하고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帥)1)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로 삼아 군사 17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여진을 정벌하게 하였다. 이에 병마 녹사(兵馬錄事) 척준경(拓俊京)이 선봉을 맡아 돌격하고, 윤관 등이 그 뒤를 이어서 진격하여 여진의 군사 5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러고 나서 선춘령(先春嶺) 위【지금의 두만강(豆滿江) 북쪽으로 700리(里) 떨어져 있는 지역이다.】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정하고, 영주(英州)⋅복주(福州)⋅웅주(雄州)⋅길주(吉州)⋅함주(咸州)⋅의주(宜州) 6개 주와 공험진(公嶮鎭)⋅통태진(通泰鎭)⋅평융진(平戎鎭) 3곳을 설치하였으니, 지금의 두만강 바깥의 북간도(北間島) 지역이다. 이어서 이곳을 북계(北界) 9성(城)이라고 부르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옮겨 와 살게 하였다.

여진이 그 근거지를 잃어버리자 고려에 보복하고자 하여 매년 침범하여 오자 윤관과 오연총이 매번 크게 격파하였으나, 여진이 다시 9성을 되돌려 주고 화친 맺기를 애걸하므로 병장기와 식량을 내지(內地)로 옮긴 후 9성을 여진에게 되돌려 주었다. 이에 여진의 추장이 조회(朝會)에 참렬하러 와서 말과 금을 바치면서 대대로 조공을 바칠 것이며 고려를 배반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였다.

그 후에 여진의 추장 오아속의 동생인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가 뒤를 이었는데, 그는 침착하고 용맹스러웠으며 또한 군사 관련 사안에 밝았다. 이에 국세(國勢)가 날로 강성하여지자 나라 이름을 고쳐 금(金)이라고 하고 황제(皇帝)를 칭하였다. 그리고 나서 요(遼)나라를 정벌하고자 하여 고려에 사신을 보내 원병(援兵)을 요청하였으나, 왕이 척준경과 김부식(金富軾)의 말에 따라 허락하지 않았다. 요나라도 금나라를 막고자 하여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고려는 이 역시 허락하지 않고 요⋅금 두 나라와 모두 원만한 관계를 맺었다. 군비(軍備)를 줄이고 문치(文治)에 힘쓰면서 의지할 곳이 없는 늙은이들을 구휼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유신(儒臣)들과 더불어 6예(藝)를 강론함으로써 소강(小康)의 다스림과 같은 치세를 이루었다.

그 후에 송(宋)나라 휘종(徽宗) 조길(趙佶)이 고려를 금나라와 연결하고자 하였으나, 고려 왕은 금나라가 굳세고 또 교활하기 때문에 교류할 만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휘종 조길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바닷길을 통해 금나라와 연합을 맺고 요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켰으나, 그 후에 결국 휘종 조길과 흠종(欽宗) 환(桓)이 금나라에 의해 사로잡히게 되었다. 금나라의 힘이 날로 강성해지자 송나라가 고려에게 권하여 금나라를 정벌하라고 하고, 또 양응성(楊應誠)을 보내 휘종과 흠종 두 황제를 모셔 오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이들 요구를 모두 들어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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