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1책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4장 내란(內亂)의 시대
  • 제3절 최씨(崔氏)의 전권(專權)

제3절 최씨(崔氏)의 전권(專權)

최충헌(崔忠獻)이 이의민(李義旼)을 주살한 후에 국정을 마음대로 함이 날로 심해져서 명종(明宗)을 창락궁(昌樂宮)에 가두고 왕의 동생 왕민(王旼)을 맞아 왕위에 세우니, 이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이 또 자신의 동생 최충수(崔忠粹)와 더불어 권력을 다투다가 병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여 최충수를 죽이고 최충헌이 삼중대광(三重大匡) 수태위(守太尉) 상주국(上柱國)이 되었다. 최충헌의 종인 만적(萬積)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최충헌은 또다시 변란이 일어날까 두려워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자신을 호위하게 함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이 하였다. 신종이 돌아가시고[崩] 그 아들 희종(熙宗)이 즉위한 후에는 최충헌이 왕을 옹립한 공이 있다 하여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는 칭호를 내리고 진강후(晋康候)에 봉하였다. 왕이 최충헌에 의해 제약을 받자 내시(內侍) 왕준명(王濬明) 등이 왕을 위하여 승병(僧兵)을 동원해서 최충헌을 죽이려고 하였다가 실패하였다. 최충헌이 왕을 미워하여 강화도(江華島)로 내쫓고, 강종(康宗)을 즉위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종이 돌아가셨으므로 최충헌이 다시 고종(高宗)을 맞아들여 왕위에 세웠으니, 최충헌이 받들어 모신 왕이 모두 4명이며, 폐위한 것은 두 번이었다.

최충헌이 죽자 그 아들 최우(崔瑀)가 그 뒤를 이어 정방(政旁)을 자신의 사저(私第)에 설치하고 온갖 일을 처리하였으므로 왕은 손 놓고 앉아서 “네, 네.” 할 뿐이었다. 몽고(蒙古)가 침입하여 오자 최우가 왕을 위협하여 강화도로 옮겨 가게 하였는데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야별초 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만이 최우를 꾸짖었으나, 최우가 김세충을 참수하고 어진 이들을 무고(誣告)하여 죽여 버렸으며, 내키는 대로 연회를 베풀어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였다. 최우가 죽자 그 아들 최항(崔沆)이 뒤를 이어 정권을 잡았는데, 그는 그 모친 대씨(大氏)를 시해하고 장군 김경손(金慶孫)을 죽였으며, 사적인 원한이 있는 자는 반역의 무리라고 무고하여 죽여 버렸다. 최항이 죽고 그 아들 최의(崔竩)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데, 이때 최의는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 별장(別將) 김인준(金仁俊) 등과 서로 미워하였다. 그러다가 유경과 김인준이 낭장(郎將) 임연(林衍) 등과 모의하여 최의를 주살하고 정권을 왕에게 되돌려 주었으므로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그 후에 왕이 돌아가시고 원종(元宗)이 즉위하면서 최씨의 4대(代)에 걸친 재앙이 그치게 되었으나, 김인준이 또 제멋대로 포악하게 굴다가 임연에 의해 피살당하였으며, 임연과 그 아들 임유무(林惟茂)도 잇따라 횡포를 부려 왕을 폐위하고 국정(國政)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에 홍문계(洪文系) 등이 삼별초(三別抄)【좌별초(左別抄)⋅우별초(右別抄)와 신의군(神義軍)】와 더불어 임유무를 목 베자 온 나라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어서 강화도를 떠나 옛 도읍 개경(開京)으로 돌아오니, 왕정(王政)이 예전과 같이 회복되었다.

인종(仁宗) 이후로 100여 년 동안 역적과 같은 신하들이 권력을 마음대로 부리고 무인들이 발호하여 왕정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으며, 정치가 부패하니 외부의 적들이 이 틈을 타서 전국을 짓밟았고, 산과 들에서는 도적떼가 동시에 일어났다. 명종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이 겨우 평정되었는데 김단(金旦) 등이 또다시 서경(西京)에 근거하여 난을 일으키자 병마사(兵馬使) 이부(李富)가 계책을 내어 이들을 토벌하였다. 남적(南賊)1)고려 무신 정권(武臣政權) 시대에 남부 지방에서 봉기한 도적 무리를 총칭한 표현. 망이(亡伊) 등이 조위총의 난을 틈타 무리를 불러 모아 공주(公州)를 함락하니, 병마사 정세유(鄭世猷) 등이 평정하였다. 또 김사미(金沙彌)와 효심(孝心) 등이 운문산(雲門山)【지금의 청도군(淸道郡)에 있다.】을 근거지로 하여 반역을 일으키자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이 격파하였으나 그 남은 무리가 이후 더욱 번성하였다가 신종 때에 이르러 병마사 정언진(丁彦眞)이 모두 토벌하였다. 고종 때에는 최우의 동생 최향(崔珦)이 홍주(洪州)에서 난을 일으켰으므로 최우가 채송년(蔡松年) 등을 보내 공격하여 죽였고, 필현보(畢賢甫)⋅홍복원(洪福源) 등이 서경에 근거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최우가 가병(家兵)을 동원하여 격파하였다. 또 담양(潭陽)의 초적(草賊) 이연년(李延年)이 무뢰배들을 취합하여 주변 고을을 공파하고 나주(羅州)를 포위하자 지휘사(指揮使) 김경손이 맞서 싸워 목을 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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