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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고사(中古史) - 제2편 부여족(扶餘族)의 웅비(雄飛) 시대
  • 제15장 거란과 몽고(蒙古)의 침입

제15장 거란과 몽고(蒙古)의 침입

고종(高宗) 때에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인 금산(金山)⋅금시(金始) 두 왕자가 요(遼)나라를 다시 부흥시키고자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항복시키고 나라 이름을 요라고 하였다가 몽고의 병사들에 의해 축출당하였다. 이에 두 왕자가 9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고려(高麗)의 서쪽 경계 지역으로 침입하여 들어오니,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 등이 연주(連州)【지금의 개천(价川)】에서 맞서 싸워 크게 격파하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연주(延州)【지금의 영변(寧邊)】 개평역(開平驛)에서 또다시 크게 격파하니, 전후로 죽은 자가 1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에 관군이 위주(渭州)【지금의 가산(嘉山)】에서 패배하자 적군이 서경(西京)으로 진격하여 함락하고,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서해도(西海道)를 지나 장단(長湍)까지 이르렀다. 김취려가 적군을 징파도(澄波渡)에서 공격하여 물리치고, 풍양(豊壤)【지금의 양주(楊州)에 있다.】에서 또 크게 격파하였다. 적군이 양주로부터 춘천(春川)으로 진격하여 함락하고, 또 원주(原州)로 진격하였다. 원주 백성들이 적군과 대치하여 총 9번의 전투를 벌였으나, 식량이 다 떨어지고 원조도 끊겨서 결국 성이 함락되었다. 그 후에 최원세(崔元世)와 김취려 등이 적군을 충주(忠州)와 원주 두 곳에서 크게 격파하여 300여 명의 머리를 베고 제주(堤州)까지 추격하니, 적군의 시체가 쌓여 강물이 막힐 정도였다. 또 박달치(朴達峙)【지금의 제천(堤川)에 있다.】까지 추격하여 가서 크게 싸워 이겼으며, 획득한 남녀 포로와 병장기⋅군수품이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 적군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 달아났다. 이듬해에 다시 여진(女眞)에게 원병(援兵)을 요청하여 와서 관군을 연이어 격파하였는데, 그 군대의 기세가 다시 떨쳐 일어났다. 이에 조충(趙冲)⋅김취려 등이 적군을 독산(禿山)에서 크게 격파하고, 김군수(金君綏)는 숙천(肅川)에서 크게 격파하여 400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때에 몽고의 원수(元帥)1)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 합진(哈眞)이 동진(東眞)【당시 금(金)나라의 포선만노(蒲鮮萬奴)가 요동(遼東) 지역을 차지하고는 동진이라 칭하였다.】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과 연합하여 고려를 원조하겠다고 하면서 서쪽 변방 지역으로 들어오니, 원수2)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 조충과 김취려 등이 그들과 군사를 합하여 거란을 강동군(江東郡)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마침내 거란의 장수와 병졸 5만여 명이 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므로 우두머리 100여 명을 참수한 후 각자의 병사들을 거두어들였다. 이때에 합진과 완안자연 등이 조충과 김취려의 웅대한 도량과 장대한 모습을 보고는 매우 존경하며 중하게 여겨서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몽고와의 사이에 통신사(通信使)가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다.

몽고는 지나(支那) 북부 지역에서 흥기하였으니, 단기 3539년(1206) 고려 희종(熙宗) 2년에 몽고의 태조(太祖) 테무친[鐵木眞]이 알난하(斡難河)【외몽고 북쪽 경계 지역】 상류에서 건국한 후 스스로를 칭기즈 칸[成吉思汗]이라고 칭하였으며, 국력이 강성하여 아시아와 유럽 두 대륙을 유린하였다. 티무르[帖木兒]와 쿠빌라이[忽必烈]가 서로 연이어 흥기하여3)역사상의 티무르 혹은 첩목아는 두 명이 확인된다. 대표적으로 티무르 제국을 세운 후 주로 중앙아시아 서쪽과 인도 방면으로 영역을 확장한 정복 군주 티무르를 들 수 있는데, 그의 가계는 몽고의 칭기즈 칸에 이어진다고 전해지며 말년에 명(明)을 정벌하려고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쿠빌라이보다 후대의 인물로서 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다른 한 명은 쿠빌라이의 신하로서 중국 정복에 공을 큰 공을 세운 첩목아이다. 여기에서 티무르와 쿠빌라이가 연이어 흥기하였다고 한 것이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필자의 착오에 의한 기술이 아닌가 의심된다. 지나 전역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고려를 넘보다가 이때에 이르러 고려를 구원한다고 하면서 군사를 움직였으나, 실제로는 고려의 허점과 내실을 살피고자 한 것이었다.

그 후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가 고려에 왔다가 돌아갈 때 금나라 사람에 의하여 피살당하였다. 몽고 사람은 고려가 사신을 죽였다고 하면서 살리타[撒禮塔]로 하여금 고려에 침입하여 철주(鐵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낭장(郎將) 문대(文大)를 사로잡아 철주 사람들에게 항복하라고 권하게 하였는데, 문대가 이를 따르지 않자 몽고인이 문대를 죽이고 철주성을 짓밟았다. 몽고가 또 귀주(龜州)를 침공하자 병마사 박서(朴犀)와 장군 김경손(金慶孫) 등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몽고군이 갖가지 방법으로 성을 공격하였으나 박서와 김경손이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면서 방어하였으므로 몽고군은 성을 포위한 지 30일 만에 철수하였다. 그 후에 몽고가 또다시 침공하여 오자 박서가 힘을 다해 싸워서 크게 격파하니, 몽고군이 다시 침범하지 못하고 군사를 돌렸다. 이후 몽고군이 안북부(安北府)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평주(平州)를 유린한 후에 예성강(禮成江)에 이르자 고려에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화친을 맺었다. 이에 살리타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다가 귀주의 방비가 견고함을 보고 노여워하여 다시 침공하여 큰 포차(砲車)로 공격하므로 박서 또한 포차를 동원하여 맞서 무수히 많은 적군을 죽였다. 이에 몽고군이 조정에 문첩(文牒)을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박서가 이를 따르지 않고 성을 지키기를 더욱 굳건하게 하면서 몽고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때 몽고의 한 늙은 장수가 성루(城壘)와 병장기를 둘러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두루 돌아다녔으나 이와 같은 모습은 보지를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몽고군이 또 자주(慈州)로 와서 공격하자 수장(守將) 최춘명(崔椿命)이 성을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으면서 몽고의 병사들을 크게 격파하였다.

그 후에 몽고가 다루가치[達魯花赤]4)몽고어로 ‘진압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서 원대(元代)에 총독(總督)⋅지사(知事)의 의미로 쓰였다. 고려에는 몽고의 1차 침입 때 처음 배치되어 원나라의 간섭이 끝나기까지 사료에 등장하고 있으며, 고려의 내정을 감시하는 민정(民政) 담당자로 활동하였다. 70명을 도성 주위 여러 주현(州縣)에 나누어 파견하여 고려의 국정을 감독하게 하자 고려가 분노하여 다루가치를 붙잡아 욕을 보인 후 강화도(江華島)로 도읍을 옮겼다. 이에 몽고의 장수 살리타가 또다시 침공하여 와서 지나가는 곳마다 모두 무참하게 죽이고 약탈하면서 처인성(處仁城)【지금의 용인(龍仁)에 있다.】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다. 이때 한 승려가 성 안에서부터 활을 쏘아 살리타를 죽이고 떨쳐 일어나 나가 싸워서 크게 이기니, 몽고군이 도망쳐 돌아갔다. 이에 그 승려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였는데, 그가 바로 김윤후(金允侯)이다.

그 후로도 몽고군이 해마다 침입하여 왔으므로 국력이 피폐해지고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 고기와 같이 짓밟혔다. 이에 부득이하게 왕족인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을 왕자라고 속여 몽고에 볼모로 보내었으니, 이때부터 몽고의 압제를 받게 되었다.

아아, 우리 부여족(扶餘族)이 1000여 년 동안 동아시아의 큰 판도 가운데 홀로 우뚝 서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세력을 점유하였는데, 불행히도 첫 번째 패배로 발해(渤海)가 멸망하여 만주(滿洲) 전역을 잃어버렸고, 두 번째 패배로 고려가 쇠약해져서 반도의 강산이 다른 민족의 억압을 받게 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나라는 스스로를 해친 이후에 남에게 해를 입는다고 하였으니, 과연 그러하구나. 만일 고려의 임금과 재상들이 현명하였고, 정치와 교화(敎化)가 그 마땅한 바를 이루어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화목하고 민심이 굳게 단결하였다면, 비록 몽고보다 백배나 더 강하고 포악한 적국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역사를 읽어 가다가 이 부분에 이르면 깨닫지도 못한 사이에 크게 탄식하며 가슴이 아파 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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