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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장 종교(宗敎)와 문장⋅학문

종교라는 것은 유교(儒敎), 불교(佛敎), 선교(仙敎) 3교이다. 유교는 기자(箕子)가 평양(平壤)에 전하였으나 국내에 널리 반포하여 시행하지 못하였다가 그 후 고구려(高句麗)의 소수림왕(小獸林王) 시대에 태학(太學)을 세워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으나 성행하지는 않았다. 백제(百濟)는 무령왕(武寧王)과 성왕(聖王)의 시대에 오경박사(五經博士)1)백제에서는 각 분야의 전문가에게 ‘박사’라는 칭호를 주었는데, 그중 『역경(易經)』⋅『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춘추(春秋)』 오경에 능통한 사람을 오경박사라고 하였다.를 설치하였다. 신라(新羅)는 신문왕(神文王) 때에야 비로소 국학(國學)을 세우고 설총(薛聰)이 당시의 신라 말[方言]로 구경2)유교의 9가지 경서(經書)로서 『주역(周易)』⋅『예기』⋅『주례(周禮)』 외에 『의례(儀禮)』⋅『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시경』⋅『서경』을 꼽는 설과 『시경』⋅『서경』⋅『춘추』⋅『효경(孝經)』⋅『논어(論語)』⋅『맹자(孟子)』를 꼽는 설, 『상서(尙書)』⋅『모시(毛詩)』⋅『의례』⋅『춘추공양전』⋅『춘추좌씨전』⋅『춘추곡량전』을 드는 설 등이 있다.의 의미를 해석하여 후학을 양성하였다. 성덕왕(聖德王) 때에는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공자(孔子)와 72명의 제자들의 화상(畫像)을 당(唐)나라에서 구해 와서 안치하였다. 경덕왕(景德王)과 경문왕(景文王)은 대학에 거둥하여 강설을 듣고 귀족 자제들을 당나라에 보내 유학하게 하니 유교가 더욱 성하였다. 고려(高麗)는 성종(成宗) 때에 경학박사(經學博士)를 12목(牧)에 설치하였고, 문종(文宗) 때에는 최충(崔冲)이 9재(齋)를 세워 여러 학생을 가르치니 당시 사람들이 그를 해동공자(海東孔子)라고 불렀다. 또 왕이 국자감(國子監)으로 행차하여 공자의 상에 두 번 절한 후 역대 선왕들의 스승[百王師]이라고 칭하였다. 예종(睿宗)은 학사들과 더불어 경서(經書)를 강론하였고, 인종(仁宗)은 노자(老子)와 장자(莊子)의 학문을 금지하고 호부 상서(戶部尙書)로 하여금 5전(五典)3)다섯 가지의 인륜(人倫)으로서 아버지의 의로움[義], 어머니의 자애로움[慈], 형의 우애[友], 동생의 공경[恭], 자식의 효성[孝]을 가리킨다.으로써 백성들을 가르치게 하였다. 또 민간의 아이들에게 『논어』와 『효경』을 나누어 주고 유신(儒臣)들은 경전을 강론하니, 유교가 점점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고 시대(中古時代)에는 유교가 크게 부진하였다.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시대에 지나(支那)의 진왕(秦王) 부견(符堅)이 승려[浮屠] 순도(順道)와 불상⋅불교 경전 등을 보내 왔으므로 이를 가지고 왕이 귀족 자제들을 가르쳤으니, 불교가 동쪽으로 전래되어 옴이 여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은 부처를 높이 받들어 복을 구하였으며, 그 후에 혜량(惠亮)과 혜관(惠灌) 등 이름난 승려들이 나와 불교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다. 영류왕(榮留王) 때에는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 불교와 노장(老莊)의 가르침을 배우게 하였다. 백제는 침류왕(枕流王) 때에 서역(西域)의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4)원문에는 마난라타(摩難羅陀)로 되어 있으나, 마라난타(摩羅難陀)로 바로잡는다.가 진(晋)나라로부터 오자 왕이 그를 예로써 영접하고 한성(漢城)에 사찰을 건립하였으니, 백제의 불법(佛法)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성왕은 사신을 지나 양(梁)나라에 보내 『열반경(涅槃經)』의 가르침을 배우게 하였고, 또 금동(金銅)으로 된 석가 불상(釋迦佛像)과 불상을 장엄하는 번(幡)과 천개(天蓋), 불교 경전과 논서(論書)를 일본(日本)에 보내며 “불교는 여러 법(法) 가운데에 가장 뛰어나니, 주공(周公)과 공자도 오히려 이를 알지 못하였다.”라고 말하였다. 위덕왕(威德王)도 또한 불경과 불상, 선사(禪師)를 일본에 보내기를 여러 차례 하였으며, 법왕(法王)은 살생을 금지하고 불교를 장려하였다. 신라는 눌지왕(訥祗王) 때에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로부터 이르렀으니, 이에 왕이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가 간언하여 반대하였으므로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이 불교의 수용을 위하여 죽었다. 법흥왕(法興王)은 불교를 크게 천명하여 여러 신하의 반대하는 간언을 듣지 않고 도살을 금지하였으며, 진흥왕(眞興王) 때에는 고구려의 승려 혜량을 승통(僧統)으로 삼아 백좌 강회(百座講會)5)정식 명칭은 인왕 백고좌 도량(仁王百高座道場)으로 100명의 고승을 초청하여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을 독송하면서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던 의식이다.를 열고 팔관법(八關法)【살생을 하지 말 것[不殺生], 도둑질을 하지 말 것[不偸盜]6)원문에는 불투맹(不偸盟)으로 되어 있으나, 불투도(不偸盜)로 바로잡는다.,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 것[不淫泆], 거짓말을 하지 말 것[不妄語], 술을 마시지 말 것[不飮酒], 높고 큰 평상에 앉지 말 것[不坐高大牀], 향유(香油)를 바르거나 화려한 장식을 하지 말 것[不着香華], 노래나 춤을 보거나 듣지 말 것[不自樂觀聽]이다. ‘관(關)’이라는 것은 막는다는 것이니, 8가지의 죄를 막는다는 뜻이다.】을 세웠다. 또 승려 각덕(覺德)을 양나라에 보내 부처의 사리(舍利)를 구해 왔으며, 새 궁궐을 희사하여 황룡사(皇龍寺)로 삼고 장육 불상(丈六佛像)을 주조하였다. 왕이 말년에는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는 스스로 법명(法名)을 법운(法雲)이라고 하였으며, 왕후(王后)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永興寺)에 머무르니, 불교의 융성함이 날로 깊어졌다. 선덕 여왕[善德女主]은 이를 더욱 장려하였으며, 문무왕(文武王)은 사람들이 재물과 토지를 불교 사원에 보시하는 행위를 금지하지 않았다. 효성왕(孝成王)은 불법을 본받아 자신이 죽으면 법류사(法流寺)에서 화장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원효(元曉)와 의상(義相), 도선(導詵) 등의 이름난 승려들이 있었고, 궁예(弓裔)는 불교를 지나치게 믿어서 스스로를 미륵불(彌勒佛)이라고 하였다.

고려는 태조(太祖)가 불교를 깊이 신봉하여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훈요(要訓)」 10편(篇)을 남겼는데, 그 글에서는 “고려를 건국한 것은 모두 부처의 힘이다.”라고 말하여 불사(佛事)를 칭송한 것이 많았다. 천축(天竺)의 승려인 법사(法師) 마후라(摩㬋羅)와 질리박일라(㗌哩縛日羅)가 고려에 오자 왕이 영접하고, 법왕사(法王寺)⋅왕륜사(王輪寺)7)원문에는 왕수사(王輸寺)로 되어 있으나, 왕륜사(王輪寺)로 바로잡는다. 왕륜사는 고려 태조가 즉위한 직후 창건한 10찰(札) 중 하나로서 개성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고려 전기에 각종 도량과 반승(飯僧) 등의 행사가 개최되었으며, 몽고 침입 때 소실되었다가 충렬왕대에 중건되었고, 공민왕대에는 노국 공주(魯國公主)의 영전(影殿)이 건립되면서 크게 융성하였으나, 언제 폐사(廢寺)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등 10개 사원을 도성에 창건하였으며, 또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하였다. 성종은 승려들을 초빙하여 국사(國師)⋅왕사(王師)로 삼았으며, 사문 30여 명을 송(宋)나라 항주(杭州)에 보내 영명사(永明寺)의 지각 선사(智覺禪師)8)중국 법안종(法眼宗)의 3조(祖)인 연수(延壽)로서 영명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흔히 ‘영명 연수’⋅‘영명 대사’로 불린다. 각 종파의 종지(宗旨)상의 차이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고 전하며, 그가 저술한 『종경록(宗鏡錄)』 100권은 선교 일치(禪敎一致)의 체계를 세운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었다.에게 가르침을 받게 하였다. 그 후 『종경록』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니, 이것이 고려 선종(禪宗)의 시작이었다. 문종 때에는 왕의 넷째 아들인 왕후(王煦)가 승려가 되어 대각 국사(大覺國師)라고 하였다. 대각 국사는 송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대장경(大藏經) 판본(板本) 15만 매(枚)를 입수하여 와서 해인사(海印寺)에 보관해 두었으며, 천태종(天台宗)을 창립하였다. 그 이후로 왕자로서 승려가 된 자가 많았다. 당시에 성행하였던 불교는 교종(敎宗)【천태종】과 선종(禪宗)【자은종(慈恩宗)9)법상종(法相宗)의 다른 이름으로 당대(唐代)에 현장(玄獎)이 인도에서 돌아와 전파한 유식(唯識) 사상을 그 제자 자은규기(慈恩窺基)가 정리하여 개종하였다. 법상종은 화엄종과 더불어 대표적인 교종으로 손꼽히는데, 여기에서 조계종과 더불어 선종으로 분류한 것은 필자의 착오로 보인다.과 조계종(曺溪宗)이 별도로 있었다.】이 있었으나, 교종은 그 교세가 선종에 미치지 못하였다.

선교는 단군(檀君) 이후로 지나(支那) 노자(老子)의 선교를 창도(唱導)하기 이전 시대에도 오히려 ‘천선(天仙)’⋅‘대선(大仙)’⋅‘국선(國仙)’이란 칭호가 있었으므로 혹자는 우리 동방(東方)에 특별한 선교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문헌으로써 증명할 만한 것이 없으니 진실로 통탄함을 감당할 수가 없다. 지나(支那)의 도교(道敎)【곧 선교】는 고구려 영류왕(榮留王) 때에 당나라 고조(高祖) 이연(李淵)이 도사(道士)와 천존상(天尊像)을 보내어 도교의 가르침을 강설하게 하므로 왕이 나라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서 듣고, 이듬해에 당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불교와 노장의 가르침을 배우게 하였다. 그 후에 천개소문(泉蓋蘇文)이 도교가 시행되지 못함을 근심하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들여 오게 함으로써 유교⋅불교⋅선교 3교가 정립하게 되었다. 또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도사 숙달(叔達) 등 8명을 보내 왔으므로 그 가르침이 성행하게 되었다. 백제와 신라에서는 도교가 매우 부진하였으며, 고려는 예종 때에 원시 천존상(元始天尊像)을 옥촉정(玉燭亭)에 안치해 두고 매달 초제(醮祭)10)초례(醮禮)라고도 하며,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이다.를 올렸다.

문장과 학문에 대해서는 고구려 유리왕(琉璃王)이 「황조시(黃鳥詩)」11)유리왕이 지은 「황조가(黃鳥歌)」를 가리키는 것으로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실려 전한다.를 지었고, 영양왕(嬰陽王) 때에는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이 고구려의 역사서인 『유기(留記)』 100권을 줄이고 잘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은 그 문장의 기세가 한없이 넓으며,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장수에게 보낸 시【그대의 신이한 계책은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고[神策究天文], 오묘한 계산은 땅의 이치를 다하였도다[妙算窮地理]. 전쟁에서 승리한 공로가 이미 높으니[戰勝功旣高], 만족할 줄 안다면 그만두기를 바라노라[知足願云止].】를 보면 을지문덕은 문(文)⋅무(武)를 두루 갖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풍속에 비록 상민(常民)과 천민(賤民)의 집안일지라도 길가에 큰 집을 지어 ‘국당(局堂)’이라 이름하고 그들 자제들로 하여금 가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으니, 고구려의 강성함은 진실로 이러한 교육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제는 고이왕(古爾王) 때에 문독(文督)이라고 하는 관리가 있어 문장과 학문을 관장하였으며, 박사(博士) 왕인(王仁)을 일본에 보내어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근초고왕(近肖古王) 때에는 고흥(高興)을 박사로 임명하였다. 그 후로 학술을 일본에 전한 자가 더욱 많아졌으며, 또 『백제기(百濟記)』⋅『백제신찬(百濟新撰)』⋅『백제본기(百濟本記)』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신라는 진흥왕 때에 대아찬(大阿飡) 김거칠부(金居柒夫) 등이 『국사(國史)』를 편수하였으니, 이때부터 문장과 학문이 크게 성하였다. 신문왕(神文王) 때에는 설총(薛聰)이 학문을 두루 섭렵하고 문장에 뛰어나서 그 이름이 한 시대를 풍미하였으며, 이두(吏讀)【‘讀’의 음은 ‘두(斗)’】를 만들었다. 헌강왕(憲康王) 때에는 임강수(任强首)와 최치원(崔致遠)의 문장이 한 시대의 으뜸이 되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중 황소(黃巢)의 죄를 나무라는 내용의 격문(檄文)12)당나라 멸망의 계기가 되었던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최치원이 881년에 쓴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가리키는 것으로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절로 침상에서 내려왔다고 하는 일화가 전한다. 현재 최치원의 시문집인 『계원필경』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을 지어 그 명성이 천하를 뒤흔들었다. 그가 저술한 책으로는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과 『사육집(四六集)』 1권, 『계원필경(桂苑筆耕)』 20권이 있다. 원성왕(元聖王) 때에는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13)원성왕 4년(788)에 설치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의 다른 명칭으로서 국학(國學)의 학생들에게 시험을 쳐서 그 성적에 따라 관리로 등용하던 관리 선발 제도이다.를 제정하였다.

고려는 광종(光宗) 때에 쌍기(雙冀)의 논의에 따라 시(詩)⋅부(賦)를 시험하여 관리를 선발하였으므로 화려하지만 내실은 없는 문장을 숭상하는 경향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문종 때에는 최충(崔冲)이 문학을 크게 진흥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는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하였다. 숙종(肅宗) 이후로는 모두 시와 부를 숭상하였는데, 의종(毅宗)은 그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서 성미가 급하고 경박한 김돈중(金敦中) 등과 함께 시⋅부를 지어 주고받으면서 무신(武臣)들을 천대하다가 마침내 화를 초래하게 되었다. 명종(明宗) 때에는 정당문학(政堂文學) 염신약(廉信若)이 다양한 서적을 두루 섭력하여 한때 뛰어난 문장과 웅대한 내용의 저술이 모두 그의 손에서부터 나왔으며, 이규보(李奎報)와 금의(琴儀) 등은 시를 잘 짓고 문장력이 공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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