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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3장 적국 원(元)나라의 사나운 위세

제3장 적국 원(元)나라의 사나운 위세

원종(元宗) 때에 최탄(崔坦)이 서경(西京)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자 원나라가 서경을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절령(岊嶺)을 분할하여 경계를 정하니, 이때부터 고려(高麗)의 북부 지역이 모두 원나라에 귀속되었으며, 군량(軍糧)을 징발하고 부녀자를 데려가기를 그치지 않았다. 충렬왕(忠烈王)은 여러 차례 원나라에 불려가고, 또 원나라의 공주를 왕후로 맞아들였는데, 원나라 공주와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정권을 좌우하였으므로 왕은 다만 이름뿐인 왕위만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다. 왕이 또한 음악과 여색(女色)에 깊이 빠져서 간사한 소인배들을 총애하여 등용하고 국사를 돌보지 않다가 태자(太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니, 그가 바로 충선왕(忠宣王)이다. 충선왕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원나라 황제[元主] 철목이(鐵木耳)가 말하기를, “충선이 옛 법도[舊章]를 고쳤다.”고 하면서 충선왕을 연경(燕京)으로 불러들이고 충렬왕을 복위하게 하였다. 충렬왕이 또한 방탕하여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므로 원나라가 활리길사(闊里吉思)로 하여금 고려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활리길사는 정치와 풍속을 바꾸려고 하여 고려 백성과 화합하지 못하였으므로 원나라 황제가 그를 파직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충렬왕이 원나라에 있는 충선왕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충선왕이 귀국하는 것을 방해하였는데, 그 후에 충렬왕이 돌아가시자 충선왕이 원나라로부터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에 머무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아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니, 이가 바로 충숙왕(忠肅王)이다. 충선왕은 스스로를 심양왕(瀋陽王)이라고 하면서 형의 아들인 왕고(王暠)를 심태자(瀋太子)로 삼고 항상 연경에 머물렀다. 그 후에 백안고독사(伯顔禿古思)【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가서 벼슬살이를 한 자】가 원나라 황제에게 참소하여 충선왕을 토번(吐蕃) 사길(思吉)【지금의 서장(西藏)】로 유배 보내자 최성지(崔誠之)⋅이제현(李齊賢) 등이 원나라 정부에 탄원을 올려서 타사마(朶思麻)【서장 지역】로 옮겼다가 그 후에 연경으로 돌아가 돌아가셨으니, 왕이 토번에 머문 기간이 4년이었다.

충숙왕 때에는 역적 권한공(權漢功) 등이 원나라의 위세를 믿고 왕을 폐위하여 심양 태자(瀋陽太子) 왕고를 왕위에 세우고자 하였으며, 적신(賊臣) 유청신(柳淸臣) 등은 고려라는 나라 이름을 없애고 행성(行省)을 세워서 원나라의 속지(屬地)로 만들고자 하였는데, 이제현이 원나라 정부에 글을 올려 그러한 재앙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이 마음이 심란하고 편치 않아서 태자에게 왕위를 넘겨주었으니, 이가 바로 충혜왕(忠惠王)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충혜왕이 놀고 즐김에 정도가 없다고 하여 원나라 황제가 그를 연경으로 불러들이고 충숙왕을 복위시켰으나, 충숙왕 또한 정사를 게을리하여 총애하던 신하[嬖幸] 박청(朴靑) 등에게 국정을 위임하였다. 그 후에 충숙왕이 돌아가시고, 충혜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원나라의 태보(太保) 백안(伯顔)과 고려의 정승(政承) 조적(曺頔)1)원문에는 조적(曹頔)으로 되어 있으나, 조적(曺頔)으로 바로잡는다. 등이 안팎에서 호응하여 심태자 왕고를 왕위에 세우고자 왕궁을 에워쌌다가 패배하였다. 결국 충혜왕이 즉위하였으나, 왕이 또다시 음탕한 짓을 함이 도가 지나치고 이조년(李兆年)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사냥을 나가서 탄환(彈丸)으로 사람들을 쏘아 죽이고, 잔악하고 포악함이 점점 심해졌으므로 원나라가 대경(大卿) 타적(朶赤)로 하여금 왕을 잡아 오게 하여 게양현(揭陽縣)【지금의 조주(潮州)】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단 한 사람도 그 뒤를 따라가는 자가 없었다. 유배를 가는 도중에 간난(艱難)과 고초가 무수히 많아서 결국 악양현(岳陽縣)【지금의 악주(岳州)】에 이르러 돌아가셨는데, 나라 사람으로서 슬퍼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충목왕(忠穆王)과 충정왕(忠定王)은 모두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그 모후[國后]가 정사를 좌우하면서 간사한 신하들을 등용하였으므로 국정이 날로 어그러졌다. 이에 충혜왕의 동생 왕전(王顓)이 충정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공민왕(恭愍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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