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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4장 적국 원나라 토벌과 국권의 회복

제4장 적국 원나라 토벌과 국권의 회복

공민왕(恭愍王) 초에 원(元)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자 호걸들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에 승상(承相) 탈탈(脫脫)이 고우(高郵)의 장사성(張士誠)을 정벌하러 가면서 고려(高麗)에 군사를 청하였으므로 왕이 승상 유탁(柳濯)과 장군 최영(崔瑩)으로 하여금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였다. 그러나 최영이 말하기를, “원나라는 우리의 원수입니다. 이 기회를 틈타 저들을 치는 것이 옳을 것이니, 도와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언하였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이에 어쩔 수 없이 가서 원나라 군사를 도와주었는데, 이때 최영이 선봉이 되어서 총 27번의 전투에서 모두 크게 승리하였고, 회안(淮安)에 진영을 옮겨 방어하면서 주원장(朱元璋)【명(明)나라 태조(太祖)】의 10만 군사를 크게 격파하여 원나라를 구원하였다. 최영이 귀국할 때에 원나라의 내부 사정을 상세히 살펴 왕에게 보고하면서 북쪽으로 원나라를 정벌하러 가기를 요청하니, 왕이 크게 기뻐하며 나라에 불충한 신하[賊臣] 기철(奇轍) 등을 주살하고 원나라의 정동행성 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함으로써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었다. 이어서 인당(印璫)과 최영을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임명하고, 유인우(柳仁雨)와 황천보(黃天甫)를 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삼아 기병(騎兵)과 보군(步軍) 1만 2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인당은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원나라의 수만 명 병사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파사부(婆娑府)를 함락하고 봉천부(奉天府)를 포위하였고, 유인우는 쌍성(雙城)을 함락하고 함주(咸州) 북쪽의 여러 진(鎭)을 되찾았다. 이때 원나라의 사신이 와서 거짓말로 협박하기를, “원나라가 장차 80만 군대를 일으켜 압록강을 건널 것이다.”라고 하자, 왕이 크게 두려워하여 원나라를 정벌하러 나갔던 군사들을 불러들이고, 인당을 참수함으로써 사과하였다.

그 후에 원나라의 홍건적(紅巾賊)【유복통(劉福通)이 병사를 일으켰을 때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기 때문이다.】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麟州)【지금의 의주에 있다.】 등 여러 주를 함락하자 부원수(副元帥) 안우(安祐)와 상장군(上將軍) 이방실(李芳實) 등이 함종(咸從)에서 9번을 맞붙어 싸워서 크게 승리하니, 적들이 도망쳐 돌아갔다. 그 후에 또다시 적당의 우두머리인 반성(潘誠)⋅사류(沙劉)⋅관선생(關先生)⋅주원수(朱元帥)1)원문에는 주원장(朱元璋)으로 되어 있으나, 주원수(朱元帥)로 바로잡는다. 등이 수십만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와서 안주(安州)를 습격하고 절령(岊嶺)에서 관군을 격파하였으며, 도성을 함락하였다. 이에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가 복주(福州)【지금의 안동(安東)】에 이르러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으로 하여금 여러 군사를 인솔하여 적당을 치게 하니, 정세운이 정의심에 복받쳐 분통해 하면서 적의 무리를 소탕하기를 자신의 임무로 삼아 안우⋅이방실⋅김득배(金得培)⋅최영과 더불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적당을 크게 격파하여 사류와 관선생 등을 참수하고 도성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평장사(平章事) 김용(金鏞)이 정세운 등이 공을 세우는 것을 시기하여 정세운⋅안우⋅이방실⋅김득배를 무고하여 모두 죽여 버렸다.

이때에 적국 원나라의 납합출(納哈出)이 또 북쪽 변경 지역을 침입하므로 우리 태조(太祖)2)여기에서부터 등장하는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의미한다.께서 진격하여 크게 물리치셨다. 또 적신(賊臣)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들어가 원의 승상(丞相) 삭사감(搠思監)과 함께 모의하여 충선왕(忠宣王)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옹립하기로 하고, 김용을 내부의 공모자로 삼아 병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향해 오자 최영⋅안우경(安遇慶) 등이 김용을 주살하고 최유를 격파하였다.

그 후에 왕이 원나라와 관계를 끊고자 우리 태조를 동북면 원수(東北面元帥)로 임명하고 지용수(池龍壽)를 서북면 원수(西北面元帥)로 삼아서 원나라를 공략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가 보병(步兵)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동녕부(東寧府) 올랄성(兀剌城)을 함락하자 여러 성이 모두 멀리서 그 명망을 듣고 스스로 귀부하여 왔으므로 동쪽으로는 황성평(皇城坪), 북쪽으로는 동녕부,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부락들이 모두 텅 비게 되었다. 군사를 더 진군시켜 요양성(遼陽城)을 공파하고, 북원(北元)3)1368년 명나라 군사가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하자 몽골 지방으로 쫓겨 간 원나라의 잔존 세력을 가리킨다.에 문서를 보내어 말하기를, “요동(遼東)과 심양(瀋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영토이므로 몽고(蒙古)와 한인(漢人)은 모두 여기에 관여할 수 없다.”라고 하시니, 이로 인하여 원나라와의 관계가 영구히 단절되었다.

고종(高宗) 이후로 100여 년 동안 원나라의 억압을 받아 한 나라의 정치와 교화에 관한 명령 및 왕위의 계승과 폐위까지도 모두 원나라의 명령을 따랐다. 심지어 충선왕과 충혜왕(忠惠王) 두 왕은 만리나 떨어진 남의 땅으로 유배를 당하여 낯선 곳의 외로운 넋이 되었는데, 다행이 하늘의 운수가 다시 돌아와서 그 굴레를 벗게 되었으나, 이때는 우리 부여족(扶餘族) 역사에서 가장 비관적인 시대이다. 독자들은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기지 말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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