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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장 신돈(辛旽)의 난

제5장 신돈(辛旽)의 난

공민왕(恭愍王)이 처음에는 정치에 마음을 두어서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 등을 등용하였는데, 그 후에는 승려 편조(遍照)에게 미혹되어 그를 사부(師傅)로 삼고 국정을 모두 위임하였다. 편조가 권력을 잡은 지 한 달 만에 대대로 공을 세운 대신[勳舊大臣]들을 참소하고 헐뜯어서 이공수(李公遂)⋅경천흥(慶千興)⋅유숙(柳淑)⋅최영(崔瑩) 등을 모두 축출하더니 그 후에 이름을 바꾸어 신돈(辛旽)이라 하고 삼중대광(三重大匡) 영도첨의(領都僉議)가 되어 더욱 권력을 마음대로 하였다. 이에 간신(諫臣) 정추(鄭樞)⋅이존오(李存吾) 등이 그를 내쫓으라고 청하였는데, 왕이 크게 노여워하여 정추와 이존오를 좌천시켰다. 이때부터 재신(宰臣)과 대간(臺諫)이 모두 신돈에게 붙어서 조정 안팎의 모든 권세가 신돈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었다. 신돈은 음탕하고 방자함이 날로 심해졌으며, 상과 벌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은혜와 원수를 반드시 갚고, 대대로 나라에 충성해 온 신하들과 큰 가문을 모두 죽여 없애 버렸으므로 신돈의 당여(黨與)가 조정에 가득 차게 되었다. 신돈이 다시 왕을 시해하고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었고, 왕이 이에 신돈을 수원부(水原府)로 유배 보냈다가 주살하고, 그의 당여를 모두 죽였으며, 일찍이 쫓아냈던 경천흥 등을 다시 불러들였다.

그 후 왕이 후사(後嗣)가 없음을 걱정하여 시신(侍臣) 홍륜(洪倫)으로 하여금 자신의 여러 비(妃)와 사통하게 하여 아들을 얻고자 하다가 마침내 익비(益妃)가 임신을 하자 홍륜을 죽여서 입막음을 하기 위해 환관(宦官) 최만생(崔萬生)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가 도리어 최만생과 홍륜 등에게 피살되었다.

왕이 돌아가시자[崩] 신돈의 아들 신우(申禑)가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 일찍이 신돈이 주살당할 때에 왕이 그의 아들 모니노(牟尼奴)를 데려다가 궁궐에서 키우면서 말하기를, “짐이 신돈의 집에 갔다가 그 집의 계집종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낳은 아이다.”라고 하였으며, 이름을 내리기를 ‘우’라고 하고 강녕 부원군(江寧府院君)으로 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인임(李仁任) 등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나가 신우를 맞아들여 즉위시킨 것이다.

신우가 처음에는 자못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점점 자라면서 놀고 즐김이 일정치 않았고 미친 듯이 미혹됨이 날로 심해졌으며, 또 이인임 등이 신우를 옹립한 공을 믿고 위세를 마음대로 부렸다. 이에 우리 태조(太祖)께서 최영과 더불어 이인임을 축출하였으며, 그 후에 태조께서 또 최영을 유배 보내고 신우를 강화도(江華島)로 내쫓았다. 그러한 후에 왕씨(王氏)의 후사를 세우고자 하셨는데, 조민수(曺敏修)와 이색 등이 은밀히 모의하여 신우의 아들인 신창(申昌)을 왕으로 세웠다. 신창이 즉위한 후 간관(諫官)이 상소를 올려 조민수를 유배 보내고, 이인임의 자손들을 관직에 등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최영을 주살하였다.

이때에 신우가 강화도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곽충보(郭忠輔)로 하여금 태조를 해치고자 하였는데, 곽충보가 도리어 이 사실을 태조에게 고하였다. 이에 신우를 강릉(江陵)으로 유배하고, 신창을 강화도로 내쫓았다가 다시 신우와 신창을 모두 죽이고, 신종(神宗)의 7세손인 왕요(王瑤)를 옹립하였으니, 그가 바로 공양왕(恭讓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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