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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오랑캐[野人]와 일본(日本) 정벌

오랑캐라고 함은 곧 여진(女眞)이니, 고려(高麗) 신우(辛禑) 때에 여진의 추장(酋長) 호발도(胡拔都)가 북쪽 변경 지역을 침입하자 태조(太祖)께서 진격하여 크게 격파하시고, 즉위하신 후에는 두만강(豆滿江) 남⋅북의 땅을 모두 차지하셨다. 그 후에 오랑캐가 명(明)나라의 요동(遼東) 지역을 침공하였다가 우리 영토로 도망쳐 왔으므로 세종(世宗)께서 명나라로 잡아 보내셨는데, 이때부터 오랑캐들이 분하게 여기어 원한을 가지고 변경 지역을 침범하였다. 세종 15년(1433)에 오랑캐인 이만주(李滿住)가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자 최윤덕(崔潤德)⋅이순몽(李順蒙)⋅오명의(吳明義) 등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이만주를 크게 격파하게 하여 오랑캐 남⋅여 400여 명과 소⋅말 700여 마리를 빼앗았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북쪽 변경 지역을 노략질하였으므로 황희(黃喜)로 하여금 영변(寧邊)에 약산산성(藥山山城)을 쌓아 방어하게 하고,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임명하여 북방의 오랑캐들을 두만강 밖으로 내쫓고 남쪽의 백성 2천여 호(戶)를 이주시켰다. 단기 3770년(1437) 세종 19년에 6진(鎭)【경흥(慶興)⋅회령(會寧)⋅종성(鍾城)⋅온성(穩城)⋅경원(慶源)⋅부령(富寧)】을 설치하여 그곳을 개척하였다. 또 두만강을 따라 긴 성벽을 쌓아서 오랑캐들을 방어하니, 고려 때 윤관(尹瓘)이 쌓은 9성(城)의 일부를 겨우 회복한 것이다. 그 후에 오랑캐인 올량합(兀良哈)이 2천 7백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함길도의 여연군(閭延郡)을 포위하자 이진(李震)⋅김성렬(金成烈)⋅이천(李蕆) 등을 보내 토벌하고, 여연군을 평안도로 옮겨 소속되게 하였으며, 무창군(茂昌郡)⋅우예군(虞芮郡)⋅자성군(慈城郡) 3곳을 압록강(鴨綠江) 가에 설치하여 오랑캐의 침입에 방비하였다.

일본은 태조 때에 이키 섬[一岐島]과 쓰시마 섬[對馬島] 두 곳을 정벌하였고, 정종(定宗) 원년(1401)에도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다. 단기 3752년(1419) 세종 원년1)원문에는 3734년으로 되어 있으나, 단기 3734년은 태종 원년이고, 세종 원년(1419)은 3752년에 해당하므로 바로잡는다.에는 왜선(倭船)이 지나(支那)로 간다고 하면서 황해도에 와서 양식을 구걸하였는데, 이때 태종께서는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셨으나 여전히 병권(兵權)을 잡고 계셨던 까닭에 유정현(柳廷顯)⋅박은(朴訔)⋅조말생(趙末生)⋅허조(許調) 등과 더불어 의논하여 쓰시마 섬을 모두 멸하고자 하시니, 조말생이 적극 찬성하였다. 이에 유정현과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병선(兵船) 277척과 군사 1만 7천여 명을 거느리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크게 물리쳤다. 그 후에 세종께서는 화호(和好)를 맺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하시면서 이예(李藝)를 쓰시마 섬에 보내어 도주(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교류 조약을 맺고, 3포(浦)【웅천(熊川)의 제포(薺浦), 동래(東萊)의 부산(釜山), 울산(蔚山)의 감포(監浦)】를 개방하여 상인이 교류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소씨[宗氏]는 대대로 우리나라와 일본을 왕래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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