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2책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10장 세조(世祖)의 혁명과 성종(成宗)의 정치

제10장 세조(世祖)의 혁명과 성종(成宗)의 정치

세종(世宗)이 돌아가시고[崩] 문종(文宗)이 즉위하셨는데,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선비들을 아끼셨다. 동궁(東宮)에 계신 지 20여 년 동안에 선왕(先王)을 잘 보좌한 것이 적잖았고, 즉위한 후에는 언로(言路)를 열고 문신(文臣)과 무신(武臣)을 아끼고 보살폈으며, 군사 대비에 뜻을 두시어 진법(陣法)을 친히 만드시고 오위부(五衛府)를 설치하시더니, 왕위에 계신 지 겨우 2년 만에 돌아가셨다. 단종(端宗)이 왕위를 이으시니, 이때의 나이가 겨우 12세였다.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이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아 충성을 다하여 보좌하고,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이 좌우에서 힘을 합하여 도왔다. 세조께서 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 등과 더불어 혁명을 꾀하였는데, 이때 김종서의 사람됨이 강직하고 용맹스러움을 꺼려하여 홍윤성(洪允成)으로 하여금 몽둥이로 쳐 죽이게 하고, 황보인⋅조극관(趙克寬) 등을 죽였으며, 김종서 등이 반역을 꾀한다고 하여 그 무리를 모두 죽였다. 그 후 세조께서 영의정(領議政)이 되셔서 내외 병마 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를 겸하여 군사와 국정의 중요한 일들을 도맡아 처리하시다가 마침내 한명회⋅정인지(鄭麟趾) 등의 보좌를 받아 보위(寶位)에 오르셨다. 이에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시어 수강궁(壽康宮)에 거처하시게 되니 성삼문이 그 부친 성승(成勝) 및 박팽년⋅이개⋅하위지⋅유응부⋅유성원⋅김질(金礩) 등과 더불어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하다가 계획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는 김질이 변란을 고발했기 때문으로 성삼문 등 여섯 신하와 성삼문의 부친 성승이 모두 잔인한 형벌을 받았으나 끝내 죄를 인정하지 않다가 죽었다. 그 밖에도 연루된 자가 많았으니, 세종께서 길러 내신 어진 인재들이 모두 주살되어 버렸다.

이에 세조가 단종을 강등하여 노산군(魯山君)으로 삼고 영월(寧越)에 머무르게 하자 금성 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세종의 6번째 아들】가 순흥(順興)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다가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모의하여 노산군을 맞아들이고자 하였다가 일이 누설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그 후에 노산군도 또한 참혹하게 돌아가셨는데, 숙종(肅宗) 때에 이르러서야 노산군의 지위를 회복시켜 묘호(廟號)를 단종이라고 하고, 여섯 신하들의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도 복구하였다.

세조께서는 천성이 호탕하고 인품이 뛰어나서 나라를 다스릴 웅대한 계획이 있으셨고, 군사 방비에 힘쓰시어 친히 병서(兵書)를 지으셨으며, 문신과 무신으로서 재주가 뛰어난 자는 관직의 서열을 따지지 않고 발탁하시고, 정치에 힘쓰셨다. 그 후에 길주(吉州) 사람인 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하여 주군(州郡)의 수령(守令)을 죽이고 함흥(咸興) 북쪽 지역을 차지하자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도총사(都摠使)로 임명하고, 허종(許琮)을 절도사(節度使)로, 강순(康純)⋅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을 대장(大將)으로 삼아 수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적의 병사들을 홍원(洪原)에서 크게 물리치고 이시애를 목 베어 죽였다.

후에 세조께서 돌아가시고 예종(睿宗)이 즉위하시자 세조께서 편찬하기 시작하셨던 『경국대전(經國大典)』 6권이 완성되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 남이와 영의정 강순이 간신(奸臣) 유자광(柳子光)의 참소로 주살되었다. 예종이 돌아가시고 성종이 즉위하셨는데, 성종은 천성이 총명하시고 학문을 좋아하셨으며, 풍습을 교화하는 데에 더욱 힘쓰셔서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는 관리들을 중시하시고, 대간(臺諫)을 숭상하고 장려하셨으며, 적전(籍田)을 친히 경작하시고 왕후(王后)는 직접 누에를 쳤다. 또 태학(太學)에 행차하시고 양로연(養老宴)을 궁궐에서 베푸셨으며, 존경각(尊經閣)을 건립하고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하고, 홍문관(弘文館)을 개설하였다. 용산(龍山) 동호(東湖)의 경치 좋은 곳에 학교를 건립하여 문장에 뛰어난 선비들로 하여금 책을 읽게 하면서 이름 하기를 ‘호당(湖堂)’이라고 하였다. 성균관(成均館)과 향교(鄕校)에 토지를 하사하시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간행하였으며, 학자들에게 명하여 『여지승람(輿地勝覽)』, 『동국통감(東國通鑑)』 등의 서적을 편찬하게 하시고, 학문을 장려하고 어질고 뛰어난 자들을 등용하여 선비의 기풍을 진작시키시니, 당시에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경국대전』이 소략하고 빠진 곳이 많다고 하여 최항(崔恒)으로 하여금 수정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곧 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 6전이다. 그러나 이것도 오히려 여전히 다 갖추지 못하였다고 하여 이극증(李克增)⋅어세겸(魚世謙) 등으로 하여금 『대전속록(大典續錄)』 1권을 편찬하여 반포하였다. 또 『오례의(五禮儀)』는 세종⋅세조 때에 이미 편찬하였으나 부족한 부분이 많았으므로 신숙주(申叔舟)⋅강희맹(姜希孟) 등에게 수정하도록 명하여 문물(文物) 제도가 크게 갖추어져서 이후 500년 동안의 정치와 법률의 기초가 되었으니, 성종의 성대한 문화와 정치는 진실로 500년 동안에 제1의 융성한 시대였다. 비록 그러하였으나 너무 너그럽고 후하여서 뇌물이 몰래 행하여졌고 또 연회를 열어 즐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연산군(燕山君)의 성품이 못나고 어리석은 것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성함이 장차 쇠퇴하는 때였던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