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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사림(士林)의 화란(禍亂)

성종(成宗)께서 돌아가시고[崩] 연산군(燕山君)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는 성품이 포악하고 도리에 어긋나서 정치와 교화를 돌보지 않고 연회를 베풀어 즐기는 것만을 좋아하였다. 후에 이극돈(李克墩)⋅유자광(柳子光)⋅윤필상(尹弼商) 등이 무고(誣告)하기를, “김종직(金宗直)이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世祖)를 비난하였고, 또 김종직의 문인(門人) 김일손(金馹孫)이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였습니다.”라고 하자 김종직을 부관참시(剖棺戮屍)하고 김일손 등 수십 명을 죽였다. 이로써 성종께서 양성하시던 당대의 이름난 선비가 모두 사라졌다. 이를 무오사화(戊午士禍)라고 한다.

무오사화 몇 년 후에 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다. 이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성종의 비(妃)】가 교만방자하고 투기를 하여 불손(不遜)하게 굴었던 일이 많았으므로 성종께서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하셨다. 연산군이 어머니가 제명을 다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즉위 후 10년(1504) 갑자년에 어머니를 추숭하여 왕후(王后)로 삼고, 폐위되어 죽었을 때에 그 논의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단죄하여 윤필상⋅김굉필(金宏弼) 등 수십 명을 죽이고, 한명회(韓明澮)⋅정창손(鄭昌孫) 등은 부관참시하였으며, 그 자손들과 친족들은 유배를 보내거나 모두 죽인 것이다. 그 잔인하고 포악함이 이를 데가 없었으니, 무오사화보다 더욱 격렬하였다. 이는 신수근(愼守勤)⋅임사홍(任士洪) 등이 악행을 부추긴 것이었다.

그 후에 연산군의 음란함과 잔학함이 날로 심해져서 양가(良家)의 부녀자를 겁탈하고 기생(妓生)과 풍악(風樂)을 매일 벌여 놓았으며, 어진 인재를 모두 내쫓고 환관(宦官) 김자원(金子猿)에게 국가 기밀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장차 위태로워지려고 하였다. 단기 3839년(1506)에 성희안(成希顔)⋅박원종(朴元宗)⋅유순정(柳順汀) 등이 서로 의논하고 자순 태후(慈順太后) 윤씨【성종의 계비(繼妃)】의 조칙(詔勅)을 받아 왕을 폐위하여 연산군으로 삼아 교동(喬桐)으로 내쫓고, 성종의 둘째 아들인 진성 대군(晉成大君)을 맞아 왕위에 세우니, 바로 중종(中宗)이시다. 이에 유순정 등 100여 명을 책봉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삼았다.

중종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신수근을 연산군 때에 탐욕스럽고 포악하게 굴었다는 죄명으로 주살하고, 왕후【신수근의 딸】를 폐위시키자 김정(金淨)⋅박상(朴祥) 등이 상소를 올리기를, “폐위한 왕후를 복위하여 죄 없이 폐위된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하였는데, 이행(李荇)⋅권민수(權敏手) 등이 이를 배척하여 김정 등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영의정(領議政) 유순(柳洵)과 좌의정(左議政) 정광필(鄭光弼) 등이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김정 등이 끝내 관직에서 쫓겨나 귀양을 가게 되었으니, 이때부터 조정에서 쟁론(爭論)의 실마리가 열리게 되었다.

이때에 중종께서 연산군의 폐정(弊政)을 개혁하고, 유교[儒術]를 숭상하며, 문치(文治)에 오로지 뜻을 두어 초야(草野)에 은거한 인재를 찾아가 만났으며, 풍습의 교화를 진작하시면서 조광조(趙光祖)를 신임하셨다. 조광조는 사람됨이 영민하고 사사로운 욕심이 없었으며, 학식이 깊고 넓으며, 정치와 법률에 정통하여 대사헌(大司憲)이 된 지 3개월 만에 온 나라의 백성이 그의 공평함을 칭송하였다. 그는 시(詩)⋅부(賦)를 시험 치는 과거(科擧)를 폐지하고 현량과(賢良科)1)중종 14년(1519)에 조광조의 건의에 따라 시행된 관리 등용 제도로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천거하게 한 후 책문(策問)을 시험하여 우수한 자를 선발하였다.를 설치하였으며, 향약법(鄕約法)을 시행하였다. 또한 『소학(小學)』의 가르침을 창성하게 하여 풍속을 바로잡고, 김정⋅김식(金湜)⋅이자(李耔)⋅김구(金絿)⋅기준(奇遵) 등 여러 어진 인재를 등용하여 지극한 다스림의 도(道)를 일으켜 세웠다.

이때에 간신(奸臣)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조광조가 장차 반역을 도모하고 있다고 무고하면서 그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安塘) 등이 힘써 구원하여 능주(綾州)로 유배 보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조광조를 죽이고 김정⋅김식 등 수십 명을 관직에서 내쫓아 귀양을 보냈다. 이에 관학(館學)의 유생(儒生) 이약수(李若水)⋅신명인(申命仁) 등 1천여 명이 상소하여 그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쫓겨나고, 정광필과 안당도 또한 파직되었다. 또 남곤⋅이유청(李惟淸) 등이 좌의정과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김전(金銓)이 영의정이 되어 현량과를 폐지하고, 어진 선비들을 내쫓고 소인배를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이다.

그 후에 송사련(宋祀連)이 좌의정 안당이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여 죽이고, 그 가족도 모두 멸하니, 당대의 어진 선비로서 죄를 받아 죽은 자들이 많았다. 이를 신묘사화(辛卯士禍)라고 한다. 심정⋅이항(李沆)⋅김극핍(金克愊) 등이 조정을 마음대로 하고, 대규모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켰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신묘삼간(辛卯三奸)이라고 불렀다. 또 김안로(金安老)가 정사에 참여하여 심정과 이항을 죽이고 김극핍을 내쫓았으나, 김안로 또한 간사하고 교활하여 이언적(李彦迪)⋅박소(朴紹) 등을 쫓아내고 정광필을 내쳤으며, 자신의 당여(黨與)인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안팎에서 상응하여 큰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키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이에 참판(參判) 윤안인(尹安仁)이 중종께 아뢰어 김안로와 허항, 채무택에게 사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였으니, 이들이 곧 정유삼흉(丁酉三凶)이다.

중종께서 돌아가시고 인종(仁宗)이 왕위에 오르셨다. 인종은 천성이 효성과 우애가 깊고 자애로우셨으나, 즉위하신 지 8개월 만에 돌아가시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시니,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이에 그 모후(母后)인 문정 왕후(文定王后) 윤씨께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시고, 윤원형(尹元衡)【문정 왕후의 동생】이 국정을 담당하였는데, 윤원형은 음흉하고 험악한 사람으로서 그의 당여인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과 더불어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叔) 등과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성종의 손자】, 봉성군(鳳城君) 이완(李岏)【중종의 8번째 아들】을 무고하여 죽이고, 당대의 이름난 선비를 모두 죽였다. 이는 윤원형과 윤임이 중종 말기부터 당여를 나누어 서로 다투다가 이때에 이르러 윤원형이 윤임을 제거하고자 하여 윤임이 계림군과 봉성군 중 한 사람을 왕위에 세우고자 한다며 무고한 것이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이듬해 병오(丙午)에 또 윤임의 남은 당여인 이약해(李若海) 등 수십 명을 색출하여 모두 죽이니, 이것이 병오사화(丙午士禍)이며, 이듬해에도 을사사화에서 살아남은 무리가 왕실을 비방하였다고 하여 송인수(宋麟壽) 등 수십 명을 죽이니, 이것이 정미사화(丁未士禍)이며, 기유년에 또 이홍남(李洪男)의 무고로 을사사화의 남은 무리를 모두 다 죄를 물어 죽였으니, 이것이 기유사화(己酉士禍)이다.

윤원형 등이 대규모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키자 인심이 이를 분통하게 여겼으나 문정 왕후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는 자가 없었고, 명종께서도 윤원형의 전횡을 싫어하시다가 문정 왕후가 돌아가신 후에 그의 관작(官爵)을 삭탈하고 고향으로 내쫓았다. 대체로 윤원형이 정권을 잡은 20년 동안에 국권을 마음대로 휘둘러 소인배를 등용하고 군자(君子)를 살육하였으므로 종묘와 사직이 거의 위태로웠다.

그 후에 명종께서 돌아가셨으나 뒤를 이를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이 유명(遺命)을 받들어 덕흥군(德興君) 이초(李岹)【중종의 일곱 번째 아들2)원문에는 자(字)로 되어 있으나, 자(子)로 바로잡는다.의 셋째 아들을 맞아 왕위에 세우니, 바로 선조(宣祖)이시다. 인순 왕태후(仁順王太后)【명종의 비】께서 함께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시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왕에게 정권을 돌려주시니, 선조께서 이황(李滉)⋅이이(李珥) 등 이름난 선비들을 등용하여 학문을 강구하고 정사를 논의하셨으며, 이미 죽은 남곤 등의 관작을 추탈(追奪)하고, 을사사화 이후에 화를 당한 사람들의 관작을 회복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윤원형⋅이기 등의 훈적(勳籍)을 깎아 없애니, 이로써 수십 년 동안 원통하게 맺혀 있던 기운이 일시에 걷히게 되었다.

그 후에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金孝元)이 서로 대립하여 붕당(朋黨)이 생겨났으니, 심의겸에게 붙은 자들은 서인(西人)이라고 하였고, 김효원에게 붙은 자들은 동인(東人)이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동인과 서인이 붕당을 나누어 이후 300년 동안의 큰 재앙을 빚어 내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영의정 이준경이 죽기 전에 유언 상소를 올려 붕당의 조짐이 있음을 말하였더니, 조정을 가득 채운 여러 신하가 모두 공격하여 배척하기를 임금을 미혹시킨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100여 년 내에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 차서 사화가 여러 차례 일어났으니, 세종(世宗)께서 양성하신 어진 군자(君子)들은 세조 때의 계유(癸酉)⋅병자(丙子) 두 화란으로 모두 죽어 버리고, 성종께서 길러 내신 인물들은 연산군 이후로 한꺼번에 다 사라져서 정치가 부진하고 인심이 등을 돌려 종묘와 사직의 명맥이 끊이지 않고 겨우 이어짐이 실과 같았다. 다행히 영민하신 선조께서 즉위하시고[臨御] 충직한 이준경이 나라의 기둥이 되어 일시에 간신들을 소탕하고 정치를 정돈하였으나, 끝내 동⋅서의 당론(黨論)이 다시 일어나서 왜구(倭寇)가 날뛰고 북쪽 오랑캐가 기회를 엿보는데도 외적을 방어할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안으로 서로 다투는 것만을 일삼다가 국가가 매우 혼란해지고,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의 고기와 같이 짓밟히게 되었으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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