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대동청사 2책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13장 임진왜란(壬辰倭亂)
  • 제1절 난(亂)에 이르게 된 원인과 세 갈래 길을 통한 적병(賊兵)의 침입

제1절 난(亂)에 이르게 된 원인과 세 갈래 길을 통한 적병(賊兵)의 침입

선조(宣祖) 초에는 동(東)⋅서(西)의 당론(黨論)이 처음 일어나 기강이 점차 어그러지고 군사 방비가 허술해졌으니 성혼(成渾)⋅이이(李珥)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당시의 정치를 통절하게 논하였다. 이이는 또 10만 명의 병사를 양성하여 위태롭고 급한 상황에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유성룡(柳成龍)이 이를 배척하기를, “태평한 때에는 성인의 학문을 닦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이요, 군사를 기르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라고 하니 온 조정이 모두 유성룡의 말에 찬동하여 군사 방비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이때에 또 인빈(仁嬪) 김씨(金氏)가 권력을 잡자 그의 오빠인 김공량(金公諒)과 영의정(領議政) 이산해(李山海)가 안팎에서 상응하여 어진 선비들을 내치고 소인배를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으므로 정치가 부패하고 인심이 크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에 일본(日本)은 남조(南朝)와 북조(北朝)가 나뉘어 300년 동안 다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등장하여 나라 안을 통일하고 부국강병(國富兵强)을 이루었다. 이에 일본이 명(明)나라를 공격하고자 하면서 소 요시토시[宗義智]를 보내 와 우리나라에 길을 빌려 달라고 하였으나 조정이 이를 거절하였다. 이듬해 황윤길(黃允吉)을 통신사(通信使)로 임명하고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로, 허성(許筬)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아 일본에 보냈는데, 이들이 돌아오자 황윤길과 허성 등은 모두 말하기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눈빛이 번뜩이고 담력과 지혜가 있으니 반드시 병사를 크게 일으켜 침입해 올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나, 김성일이 홀로 말하기를 “그는 절대로 침입해 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윤길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동인(東人)이었기 때문에 조정 신하들은 각각 자신의 붕당(朋黨)을 비호하여 의논이 분분하였다. 결국 선조께서는 김성일이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하였다고 하면서 그의 직위[官資]를 올려 주고 황윤길은 축출하였으며, 점점 변경의 방비를 소홀히 하였다. 이에 군관(軍官) 황진(黃進)이 김성일이 조정을 속인 죄를 논하여 참수하기를 요청하였고, 조헌(趙憲)도 또한 상소하여 군사 방비를 세우기를 요청하였다가 쫓겨났다.

그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우리나라에서 명나라로 가는 길을 빌려 주지 않음을 노여워하여 단기 3925년(1592) 선조 25년 임진(壬辰)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등으로 하여금 육군 20만 명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게 하고,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은 수군(水軍) 9천여 명과 전선(戰船) 수백 척으로 해상에서의 호응을 준비하게 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상륙하여 부산(釜山)을 공격하자 첨사(僉使) 정발(鄭撥)이 적군의 전선을 침몰시키고 병사와 백성들을 모아서 죽을 각오로 성을 지키다가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끝내 죽고 말았다. 적이 또 동래(東萊)를 침범하자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병사와 백성들을 동원하여 방어하다가 반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고 송상현은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으니 적이 그의 의로움에 감동하여 그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적이 세 갈래로 길을 나누어 도성[京城]으로 향하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는 중로(中路)를 택하여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나아가고, 가토 기요마사는 동로(東路)로 나아가 기장(機張)⋅울산(蔚山)을 거쳐 죽령(竹嶺)을 넘어 충주에서 중로군(中路軍)과 합세하였으며, 구로다 나가마사는 서로(西路)로 나아가 김해(金海)에서부터 추풍령(秋風嶺)을 넘어 청주(淸州)⋅죽산(竹山)으로 향하였다. 변경 지역에서 경보(警報)가 날마다 올라오자 조정에서 급히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하여 중로군을 방어하게 하고, 성응길(成應吉)은 동로로, 조경(趙儆)은 서로로 내려가게 하였으며, 유극량(劉克良)과 변기(邊璣)는 죽령과 조령을 지키게 하고, 유성룡과 김응남(金應南)을 체찰사(體察使)로 임명하여 감독하게 하였다. 얼마 후에 급보(急報)가 연달아 올라오자 도성 안이 크게 동요하였으므로 신립(申砬)으로 하여금 막강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조령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에 이일이 상주(尙州)에서 크게 패배하였는데, 신립이 그 소식을 듣고는 크게 두려워하여 충주로 퇴각하고자 하였다. 이에 종사(從事) 김여물(金汝岉)이 조령을 굳게 지켜서 적을 방비하자고 하니, 신립이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말하기를, “저들은 보병(步兵)이고 우리는 기병(騎兵)이니 넓은 들에서 무장한 기병들로 들이닥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고, 충주로 들어가 강을 등지고 진을 쳤다. 그 후에 적들이 조령을 지키는 병사들이 있을까 염려하여 2~3번 정탐을 하다가 지키는 병사들이 없음을 알고는 충주로 진격하여 함락시키니, 신립과 김여물이 모두 죽고 이일은 달아났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