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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2절 대가(大駕)가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옮기다[播遷]

제2절 대가(大駕)가 도성을 떠나 서쪽으로 옮기다[播遷]

신립(申砬)이 패배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정이 크게 놀라서 왕자들을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고, 이양원(李陽元)과 김명원(金命元)으로 하여금 도성에 머물며 지키게 하였으며, 선조(宣祖)께서는 호종(扈從)하는 신하 이산해(李山海)⋅유성룡(柳成龍)⋅윤두수(尹斗壽)⋅이항복(李恒福) 등 100여 명을 거느리고 대궐을 나가 서쪽으로 향하셨다. 한밤중에 궁궐 문을 나가서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는데, 이때에 큰 비가 세차게 쏟아져 한치 앞도 분간할 수가 없었으니, 그 곤란함이 한이 없었다.

그 후에 성난 백성들이 궁궐을 불태우고 내탕고(內帑庫)1)조선 시대에 왕실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던 창고.를 헐어 금과 비단을 약탈하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보기(寶器)와 문적(文籍)들이 흔적 없이 모두 사라졌다.

왕이 개성(開城)에 이르시자 이산해와 김공량(金公諒)을 쫓아내고, 「애통조(哀痛詔)」를 내리셔서 8도의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셨다. 이때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도성을 함락하고 이양원⋅김명원 등이 달아나자 왕이 병사들을 보내 임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다시 평양(平壤)에 이르시자 여러 신하를 불러 모아 의논하셨는데, 이때 이항복이 명(明)나라에 원군(援軍)을 요청하고자 하자 윤두수가 말하기를, “지금 임진강을 지키고 있으면 삼남(三南) 지방과 북도(北道) 지방의 병사들도 또한 구원하러 올 것이다. 만일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가 그들이 위력을 부려 제멋대로 난폭하게 군다면 다시 명나라 병사들의 유린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결국 이항복의 논의를 따라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신할(申硈)을 대장(大將)으로 임명하여 김명원⋅한응인(韓應寅)과 더불어 임진강을 지키게 하니, 적병이 남쪽 강가에 이르렀으나 강을 건너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때 신할이 유극량(劉克良)의 간언을 듣지 않고 군사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가 적병을 추격하다가 크게 패배하였다. 유극량이 일이 벌어진 것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여기가 내가 죽을 자리이다.”라고 하고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었다. 이에 적들이 곧 강을 건넜다.

적병이 또 대동강(大同江)에 접근하자 왕이 윤두수⋅김명원⋅이원익(李元翼)으로 하여금 평양을 지키게 하고, 대가를 움직여 북도 지방으로 향하고자 하다가 가토 기요마사가 철령(鐵嶺)을 넘어 함경도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다시 길을 바꾸어 의주(義州)로 향하셨다. 박천(博川)에 이르자 군사 기무를 광해군(光海君)에게 위임하여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고는 친히 의주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다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셨다. 윤두수는 대동강을 지키다가 고니시 유키나가가 왕성탄(王城灘)의 수심이 얕은 곳을 따라 강을 건너왔으므로 병장기(兵仗器)를 연못에 가라앉히고는 도망쳤으니, 이로써 평양이 또한 무너졌다.

이때에 명나라는 우리나라가 구원병을 요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 내의 논의가 분분하였는데, 오로지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만이 구원하러 갈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부총병(副總兵) 조승훈(祖承訓)으로 하여금 요동병(遼東兵) 5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돕게 하니, 평양으로 진격하여 공격하였으나 패배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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