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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절 명(明)나라 군사의 원조와 일본군의 패주

일전에 명나라가 조승훈(祖承訓)이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 후한 상을 내걸기를 조선(朝鮮)을 회복시키는 자가 있으면 은 1만 냥(兩)을 주고 백작(伯爵)에 봉하여 대대로 세습하게 하겠다고 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말로 달래어 일본 병사의 진군을 늦추게 할 자를 구하니 심유경(沈惟敬)이 모집에 응하여 석성(石星)에게 가서 말하니, 석성이 크게 기뻐하며 심유경을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고 평양(平壤)으로 가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설득하게 하였다. 심유경이 이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설득하여 50일 내에 화친 조약(和親條約)을 맺기로 약속하고, 평양 서북쪽에 나무 표식을 세워 일본 사람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조선 사람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썼다.

명나라가 비록 심유경을 보내었으나 구원병을 내보낼 뜻이 없었는데, 왕이 또다시 정곤수(鄭崑壽)를 보내어 원병을 요청하게 하자 정곤수가 명나라에 이르러 병부(兵部)에 문서를 올린 후 문 밖에 서서 통곡하기를 여러 날 동안 하였다. 석성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궁궐 뜰에서 7일 동안 곡을 한 일이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1)진나라의 궁궐 뜰에서 7일 동안 곡을 하였다는 것은 중국 초(楚)나라가 오(吳)나라의 침략을 받자 초나라의 대부(大夫) 신포서(申包胥)가 진나라 애공(哀公)을 찾아가 7일 동안 음식을 끊고 울면서 구원병을 요청하였다는 고사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하고, 명나라 황제에게 힘써 요청하여 송응창(宋應昌)을 경략(經略)으로 임명하고, 이여송(李如松)【이여송은 이성량(李成樑)의 아들이니, 그의 선조는 우리나라 평안도(平安道) 사람이다.】을 동정 제독(東征提督)으로 삼아,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군사를 나누어 삼협(三脇)이 되고,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은 삼협 대장(三脇大將)이 되니, 그 병사의 수가 4만 3천여 명이었다. 평양으로 진군하자 우리나라의 도원수(都元帥)와 의병장(義兵將)들이 또한 병사들을 이끌고 와서 전투를 도왔다.

이때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심유경이 약속한 기한을 어긴 것을 보고 의심스럽게 여겨 성을 공격할 채비를 크게 갖추었다. 그러나 이보다 앞서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항복해 온 김순량(金順良) 등을 정탐꾼으로 삼아서 각지의 정세를 몰래 살피다가, 군사 기밀이 누설될까 두려워하여 김순량 등을 죽여 버린 후로는 명나라의 군사가 이르렀어도 알지 못하고 오직 화의(和議)만을 믿고 있다가 갑자기 명나라 군사의 습격을 당하니,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사가 겨우 1만 5천 명만 남게 되었다. 이여송이 급속히 외성(外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적군으로서 죽거나 다친 자가 매우 많았으므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가 한밤중에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경성(京城)으로 도망쳤다. 이에 이여송이 개성(開城)으로 쫓아가서 대군(大軍)을 주둔시키고, 직접 파주(坡州) 벽제점(碧蹄店)으로 진격하였다가 적의 장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와 다치바나 무네시게[立花宗茂] 등에게 패하고 개성으로 퇴각하였다. 다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함경도(咸鏡道)로부터 와서 평양을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왕필적(王必迪)에게 개성을 지키게 하고, 이여송은 평양을 돌아와 성을 지켰는데, 후에 권율(權慄)의 행주 대첩(幸州大捷) 소식을 듣고 회군한 것을 후회하였다.

처음에 이여송이 강화(講和)를 맺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아서 심유경을 참수하려고 하였다가 벽제점에서 패배한 후로 크게 사기를 잃고 심유경을 보내어 강화를 맺고자 하였고, 적군 또한 평양에서 패배한 후로 양식이 바닥나고 군사들의 기세가 꺾였으므로 강화를 하고자 하였다. 이때 경성 및 각지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적이 급히 경상도(慶尙道) 남쪽 변경 지역으로 퇴각하자 이여송이 경성으로 곧장 들어갔다. 유성룡(柳成龍)이 이여송에게 권하여 적군을 추격하라고 하였으나 이여송은 그러할 뜻이 없다가 적군이 멀리 떠나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문경(聞慶)까지 추격하여 갔다가 군사를 돌려 돌아왔으며, 적군은 경상도 남쪽 변경에 성을 쌓고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장기간 머무를 계책을 실행하였다.

얼마 후에 명나라의 심유경이 강화의 일로 일본으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田秀吉]와 강화 조약 7개 조(條)를 정하고, 이전에 사로잡혔던 두 왕자와 황정욱 등이 돌아오자 왕이 경성으로 돌아오셨다. 명나라는 송응창⋅이여송을 불러들이고 오직 유정(劉綎)으로 하여금 병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게 하여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게 하였으며,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을 정(正)⋅부사(副使)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가게 하였다. 조정에서는 강화를 맺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돈령 도정(敦寧都正) 황신(黃愼)을 정사(正使)로 임명하여 명나라 사신과 동행하게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大阪]에서 사신을 맞아 만났는데, 명나라의 고명(誥命)에서 말하기를, “너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봉하여 일본 국왕으로 삼으니, 땅을 할애하고 딸을 보내라.”라고 하였으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노여워하여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왕은 황신의 임무가 달성되지 못한 것을 기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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