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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절 적병(賊兵)의 재차 침입과 패주

제6절 적병(賊兵)의 재차 침입과 패주

강화(和議)가 이미 실패하자 단기 3930년(1597) 선조(宣祖) 30년 정유(丁酉)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이 다시 군사 14만여 명을 거느리고 침입하였다. 왕이 급히 명(明)나라에 알리자 명나라가 형개(邢玠)를 총독(總督)으로 임명하고 양호(楊鎬)를 경략(經略)으로 삼았으며, 마귀(麻貴)는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양원(楊元)⋅오유충(吳惟忠)⋅우백영(牛伯英)⋅진우충(陳愚衷) 등을 거느리고 도우러 왔다. 우리나라는 복수군(復讐軍)1)임진왜란 때에 임시로 설치한 군사 조직으로서 전란 중 왜군에 의해 부모⋅형제⋅처자(妻子)를 잃은 사람들을 모집하여 편성하였다.을 처음 설치하여 병사들을 8도(道)에서 모집하였고, 의용병(義勇兵)이 사방에서 일어나 적을 방어하였다. 적이 남원(南原)을 함락하자 수장(守將) 이복남(李福男)⋅오응정(吳應鼎) 등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고 명나라 장수 양원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명나라 장수 진우충(陳愚衷)은 전주(全州)를 지키다가 남원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달아나니, 전주가 또한 함락되어 경기 일대가 크게 동요하였다. 이에 명나라 장수 양호가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우백영⋅양등산(楊登山) 등으로 하여금 소사평(素沙坪)에서 적의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을 크게 격파하자 적이 군사를 돌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순천(順天)에 주둔하고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울산(蔚山)에 주둔하였으며,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다. 양호⋅마귀 등이 삼협(三脇)의 병사 4만여 명을 거느리고 도원수(都元帥)2)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 권율(權慄)과 더불어 울산의 적을 1년 남짓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경성으로 돌아왔다가 양호가 간신(奸臣) 정응태(丁應泰)의 참소를 당하여 파직되어 돌아가고 만세덕(萬世德)이 대신 오니, 거느리고 온 병사가 10만 명이었다. 네 갈래로 길을 나누어 마귀는 동로(東路)로 가서 가토 기요마사를 공격하고, 동일원(蕫一元)은 중로(中路)로 가서 시마즈 요시히로에 맞섰으며, 유정(劉綎)은 서로(西路)로 가서 고니시 유키나가를 공격하고, 진린(陳璘)은 이순신(李舜臣)과 더불어 수로(水路)를 따라 육군에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우리나라 여러 도(道)의 병사들이 모두 명나라 군사를 따랐는데, 후에 마귀는 가토 기요마사를 이기지 못하였고, 유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거짓으로 화약을 맺어 그를 사로잡으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으며, 동일원은 사천(泗川)에 침입한 적을 공격하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패하니, 이후로 명나라 병사들은 다시 출전하지 않았다. 이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田秀吉]가 죽었으므로 적군 또한 군사를 돌리려고 하다가 노량(露梁)에서 이순신에게 크게 패하여 도망쳐 돌아가고, 남은 적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명으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왜구(倭寇)가 전후 8년 만에 평정되었으니, 이때가 단기 3932년(1599)인 선조 32년 기해(己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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