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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광해군(光海君)의 학정(虐政)과 인조(仁祖)의 혁명 및 이괄(李适)의 난

선조(宣祖)께서 돌아가시고[崩] 둘째 아들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광포(狂暴)하였던 까닭에 즉위 초에 자신의 형인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을 죽이고자 하여 반역을 도모한다고 하면서 교동(喬桐)으로 유배를 보냈다. 이때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은 이진을 죽이고자 하였고, 이원익(李元翼)⋅이항복(李恒福)은 전은설(全恩說)1)은혜를 온전히 한다는 의미로서 부자나 동기간 등 가까운 사이에는 죄가 있더라도 그 생명은 해치지 않는다는 설이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 중에는, 임해군의 옥사 외에 영창 대군이 사사(賜死)되었던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 때에도 정온 등에 의하여 전은설이 주장된 바 있다.을 주장하였으나, 마침내 이진에게 사약(死藥)을 내려 죽게 하고 이원익 등은 반역자를 비호한다고 하여 죄를 주었다. 이이첨⋅박응서(朴應犀) 등이 또 무고(誣告)하기를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인목 태후(仁穆太后)의 부친】이 영창 대군(永昌大君)【선조의 원자(元子)】 이의(李㼁)를 옹립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므로 광해군이 김제남을 잡아 죽이고, 이의는 강화도(江華島)로 내쫓았다가 정항(鄭沆)으로 하여금 죽이게 하였다. 당시 영창 대군의 나이는 7세였으며, 대신(大臣)으로서 연루된 자가 많았다. 이이첨이 또 인목 태후【선조의 비(妃)로서 영창 대군의 모후(母后)】를 폐위하려고 하자 기자헌(奇自獻)【영의정(領議政)】⋅이항복⋅정홍익(鄭弘翼)⋅이원익⋅정온(鄭蘊) 등이 극력으로 간언하므로 이이첨이 여러 신하와 종실(宗室) 1천여 명을 모아 놓고 각자 그 의견을 말하게 하였는데, 어떤 이는 이이첨을 두려워하여 태후의 폐출(廢黜)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이는 그 의견에 따르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이에 기자헌⋅이항복 등을 먼 곳으로 내쫓고 태후를 폐위하여 서궁(西宮)에 유폐하였다. 이후에 또다시 태후를 해치고자 하였으나 태후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이이첨⋅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이 안팎에서 호응하여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대규모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켜서 권필(權韠)⋅황혁(黃爀) 등을 죽였으며, 군자(君子)를 내쫓고 소인배를 관직에 나아가게 하였다. 또 대북(大北)【이이첨의 당파(黨派)】과 소북(小北)【박승종의 당파】 두 붕당(朋黨)이 서로 다투어서 국정이 날로 어그러지고 관직(官職)과 작위(爵位)를 팔았으며, 뇌물이 성행하였으므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이 거의 위태롭게 되었다.

이에 김유(金瑬)⋅이귀(李貴)⋅신경진(申景禛)⋅이서(李曙)⋅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이 서로 상의하여 능양군(綾陽君)을 추대하기로 하고, 단기 3956년(1623) 계해(癸亥)에 의병을 일으켜 궁궐 문을 쳐부수고 광해군을 잡아서 인목 태후의 명으로 36가지 죄목을 헤아려 강화도로 내쫓고 능양군을 맞아 왕으로 세우니, 바로 인조이시다.

인조께서 즉위하시자 전조(前朝)에서 억울하게 죄를 입은 자들을 신원(伸寃)하여 주고, 이원익 등 옛 신하들을 불러 등용하였으며, 이이첨⋅정인홍 등을 죽이거나 내쫓았다. 또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정하여 김자점⋅심기원 등은 1등 공신이 되고, 이괄은 2등이 되었다. 당초 혁명을 일으킬 때에 이괄의 공이 많았는데, 이제 도리어 다른 사람의 아래에 위치하게 되자 이괄이 불만을 품고 있다가 평안 병사(平安兵使) 겸(兼) 부원수(副元帥)2)원문에는 사(師)로 되어 있으나, 수(帥)로 바로잡는다.가 되어 영변(寧邊)에서 주둔하게 되자 더욱 원망스럽게 여겼다. 이에 음모를 세우다가 이듬해 갑자(甲子)에 부하들 중에서 정예 병사 1만 2천여 명을 이끌고 귀성 부사(龜城府使) 한명련(韓明璉)과 더불어 궁궐로 향하니, 장만(張晩)이 비록 도원수(都元帥)로서 평양(平壤)에 있었으나 그 병력이 미약하여 적도들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이에 적신(賊臣) 이괄이 도성[京城]으로 곧장 향하자 인조께서 공주(公州)로 파천(播遷)하시니, 이괄이 도성을 함락하였다. 이후 장만⋅정충신(鄭忠信)⋅이서 등이 힘을 모아 이괄을 안현(鞍峴)【경성의 북쪽 지역】에서 크게 격파하자 이괄과 한명련 등이 달아났다가 부장(部將) 기익헌(奇益獻)에게 죽임을 당하여 그 머리가 행재소(行在所)에 내걸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괄의 난이 평정되고 인조께서 도성으로 돌아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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