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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15장 만주(滿洲)와의 관계
  • 제2절 만주의 화의(和議) 단절과 침입

제2절 만주의 화의(和議) 단절과 침입

그 후에 만주(滿洲)가 강성함을 믿고 제멋대로 굴며 난폭하여서 형제의 맹약을 바꾸어 상국(上國)⋅하국(下國)의 관계를 삼고자 하였으며, 해마다 바치는 공물(貢物)을 요구함에 정해진 한도가 없으므로 조정(朝廷)과 민간이 모두 분노하여 만주를 치고자 하였다. 이때에 만주가 승정(承政) 마복탑(瑪福塔)【마부달(馬夫達)】과 영아이대(英俄爾岱)【용골대(龍骨大)이니, 이 두 사람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만주에 들어가 벼슬을 한 자들이다.】를 보내어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상(喪)을 조문하게 하였는데, 만주 팔화석(八和碩) 패륵(貝勒)1)친왕(親王)⋅군왕(郡王)⋅패자(貝子)⋅진국공(鎭國公)⋅보국공(輔國公) 등과 더불어 청나라 때 만주인 종실(宗室)과 몽고인 외번(外藩)에게 내려진 작위(爵位)로서 만주어로 부장(部長)이라는 의미이다.과 몽고(蒙古)의 49명 패륵이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어 황태극(皇太極)에게 존호(尊號)를 올리기를 권하자 조정과 민간이 모두 크게 노여워하며 만주의 사신을 참수하기를 청하였다. 왕도 또한 사신을 만나보지 않으시고 패륵의 서신도 받지 않으셨으므로 영아이대가 크게 두려워하여 도망갔다. 이에 만주와의 관계가 끊겼으며, 홍익한(洪翼漢)⋅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 등이 상소하여 화의를 단절하자고 하니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호응하였다. 그러나 모두 헛된 논의였을 뿐 한 사람도 적을 방어할 준비를 생각하는 자가 없었다. 오직 이조 판서(吏曹判書) 최명길(崔鳴吉)만이 깊이 걱정하여 화의를 유지할 것을 주창하고 병사와 군마(軍馬)를 훈련시키고자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단기 3969년(1636) 인조(仁祖) 14년 병자(丙子)에 만주가 나라 이름[國號]을 바꾸어 청(淸)이라 하고, 태종(太宗) 황태극이 직접 10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와서 선봉에 선 마부달과 용골대로 하여금 도성[京城]으로 곧장 향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의주 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이 청나라가 장차 침입할 것임을 알고 백마산성(白馬山城)을 쌓고 조정에 2만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대비하고자 하였으나, 간신(奸臣)의 방해로 인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에 임경업이 이르러 백성과 병사 800명을 이끌고 성을 지키니,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고 사잇길을 통해 진군하였는데, 임경업은 병졸의 수가 적어서 진격하지는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통곡할 뿐이었다.

적이 폭풍우와 같이 빠르게 행군하여 10여 일 사이에 도성에 도달하자 왕이 급히 비빈(妃嬪)과 왕자, 군사와 군수품을 강화도(江華島)로 보내고 왕 또한 강화도로 옮겨 가고자 하였는데, 이때 적의 선봉군이 벌써 도성을 핍박하여 왔다. 이에 이조 판서 최명길과 동중추(同中樞) 이경직(李景稷)이 성밖으로 나가 적군을 맞이하여 병사를 일으킨 이유를 묻고, 연회를 베풀어 군사들을 위로하면서 진군을 늦추게 하니, 왕이 그 사이를 틈타 급히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셨다. 근왕병(勤王兵)을 소집하고 명(明)나라에 위급함을 알린 후 성을 굳게 지키면서 외부의 원조를 기다리고자 하였는데, 청나라 태종이 이미 도성을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며, 정예 병사를 보내 강화진(江華津)을 함락시킴으로써 외부의 원조가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 근왕병이 구원하러 왔으나, 충청 감사(忠淸監司) 정세규(鄭世規)는 금천(衿川)【광주(廣州)】에서 패배하여 전군(全軍)이 몰락하였고, 경상 병사(慶尙兵使) 허완(許完)⋅민영(閔栐)은 쌍령(雙嶺)【광주】에서 패하여 전사하였으며,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은 광교산(光敎山)【광주】에서 싸워 적의 장수 액부양고리(額駙揚古里)를 죽였으나, 마침내 적은 수의 군사로 대규모의 적군을 당해 내지 못하고 패배하여 전사하였다. 평안 감사(平安監司) 홍명구(洪命耉)는 김화(金化)【강원도】에서 여러 날 동안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죽고, 부원수(副元帥) 신경원(申景瑗)은 철옹(鐵瓮)【평안도】에서 사로잡혔다. 각 도의 구원병이 모두 무너지자 적이 병사들을 풀어서 사방을 노략질하니, 백성들이 물고기나 짐승의 고기와 같이 짓밟혔다. 임경업이 청나라로 돌아가는 적의 장수 요추(要椎)를 공격하여 죽이고, 정예 병사들을 수습하여 청나라의 도읍[國都]을 치러 가려고 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명나라는 떠돌아다니는 도적들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여 구원하러 올 힘이 없었기 때문에 겨우 등래 총병(登萊總兵) 진홍범(陳洪範)으로 하여금 수군(水軍)을 통솔하여 구원하러 가게 하였으나, 바람이 거세어 배를 띄우지 못하였다. 적이 우리가 외부의 원조가 없음을 알고 더욱 중무장한 군사들로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으며, 배를 만들고 성을 공격할 도구를 갖추어 강화도를 침범하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김경징(金慶徵)은 검찰사(檢察使)가 되고, 이민구(李敏求)는 부검찰(副檢察), 장신(張紳)은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어 강화도를 지키고 있었다. 김경징이 지형의 험난함을 믿고 대비를 세우지 않은 채 다만 술에 빠져 있다가 적병이 갑자기 작은 배 80여 척으로 바다를 건너와 대포로 성첩(城堞)을 공격하자 아군(我軍)이 싸워 보지도 않고 스스로 무너졌다. 이에 김경징과 이민구 등이 먼저 작은 배를 타고 도망쳤으므로 성이 함락되어 비빈과 왕자, 대신(大臣)들이 모두 사로잡히고, 김상용(金尙容)⋅이상길(李相吉) 등은 분신(焚身)하여 죽었으며, 이시직(李時稷)⋅심현(沈誢) 등은 모두 목을 매어 죽고, 피난온 사녀(士女, 양반의 여인)들로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었다. 그날의 참혹함은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때에 남한산성에서는 겹겹이 포위당한 지 40여 일이 되자 양식이 부족해지고, 군사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리게 되어 간난(艱難)과 고초(苦楚)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다만 구원병과 강화도만을 믿고 있다가 이제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온 성이 크게 놀랐다. 왕이 이에 최명길의 말에 따라 청나라 태종을 가서 뵙고 화친(和親)을 맺으니, 청나라 태종이 태자(太子)와 봉림 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하여 청나라에 머무르게 하고 강화도의 포로를 모두 돌려보냈으며, 척화신(斥和臣)2)병자호란 때에 청나라와의 화친을 극력으로 반대한 신하를 일컫는다.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붙잡아 가고 병사들을 철수시키니, 이때가 단기 3970년(1637) 정축(丁丑)이었다.

이보다 앞서 청나라와의 화친을 논의할 때에 정온(鄭蘊)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칼로 배를 갈랐으며, 김상헌(金尙憲)은 화친을 청하는 서신을 찢고 통곡하였다. 오방언(吳邦彦)은 강에 몸을 던져 죽었으니, 대개 오방언의 조부(祖父) 오응정(吳應井)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전사하였고, 부친 오직(吳稷)은 만주 전투에서 죽었으므로 한 가문의 3대가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다. 이때에 조정과 민간이 모두 원통해 하고 분하게 여겼으나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아아, 임경업은 예부터 보기 드문 명장(名將)이었으나 간신의 방해로 인하여 병사들을 내어 주지 않았고, 강화성은 천연의 요새로서 험난한 땅이지만 어리석은 자가 생각이 없어서 적절한 방어를 하지 않았다가 마침내 적병에 의해 유린을 당하여 성 아래에서 화친의 맹약을 맺기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통해 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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