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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3절 청(淸)나라의 징병(徵兵)과 북벌(北伐)의 계획[經營]

제3절 청(淸)나라의 징병(徵兵)과 북벌(北伐)의 계획[經營]

이때에 청나라가 군사를 돌려 돌아가다가 명(明)나라 장수가 점거하고 있는 가도(椵島)를 공격할 때 우리나라의 병사들을 징발하니, 왕이 어쩔 수 없이 유림(柳琳)과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전선(戰船)을 이끌고 가서 돕게 하였다. 그러나 명나라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도와준 은혜를 감격해 하고 청나라의 병자년(丙子年) 침입을 노여워하여 겉으로는 전투를 돕는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갖가지 방법으로 방해를 하였다. 임경업이 또 이 일을 가도 도독(椵島都督) 심세괴(沈世櫆)에게 은밀히 알렸으므로 가도의 성이 함락되었어도 피해를 면한 자가 많았다.

그 후에 청나라가 또다시 명나라의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면서 우리에게 병사를 징발케 하자 왕이 임경업과 이완(李浣)으로 하여금 전선 120척과 병사 6천 명, 쌀 1만 석을 이끌고 가서 도우라고 하시니, 임경업이 석성도(石城島)에 이르러 은밀히 배를 보내 명나라와 연락을 취하였다. 또 명나라 전선과 맞붙어 싸우게 되자 임경업이 화살에서 화살촉을 제거하고, 포(砲)에는 탄환을 쓰지 않았으므로 두 군대에서 죽거나 다친 자가 없었다. 그 후에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김상헌(金尙憲)⋅이경여(李敬輿)를 붙잡아 가고, 최명길(崔鳴吉)과 임경업이 승려 독보(獨步)로 하여금 명나라와 몰래 통하게 하였다고 하면서 잡아갔다. 이때 임경업이 도중에 도망하여 명나라의 등주장(登州將) 황종예(黃宗藝)에게로 가서 의탁하며 큰일을 도모하고자 하였다가 명나라의 역적들에 의해 일이 그르쳐서 적에게 붙잡혔다. 그 후에 청나라 태종(太宗)이 죽고 세조(世祖) 복림(福臨)이 즉위하자 더욱 강성해져서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북경(北京)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세자[東宮]와 봉림 대군(鳳林大君) 및 잡아 가두었던 대신(大臣) 김상헌⋅이경여⋅이명한(李明漢)⋅최명길 등을 돌려보냈다.

인조(仁祖)께서 병자년의 원수를 갚고자 하셨으나 국력이 미약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효종(孝宗)께서 즉위하시자 청나라에게 굴욕을 당한 일을 더욱 분하게 여기셔서 성과 해자(垓字)를 보수하고 병장기(兵仗器)를 정비하였으며, 병사와 군마(軍馬)를 친히 검열하고, 군량(軍糧)을 준비하였다. 또 송시열(宋時烈)을 영의정(領議政)으로 임명하고 이완을 훈련대장(訓鍊大將)으로 삼아 북벌(北伐) 계획에 골몰하여 추진하니, 전국의 백성들이 모두 호응하여 토지를 팔아 군마를 갖추고 융복(戎服)을 마련하여 군대를 따라 전쟁터로 나가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불행히도 효종께서 왕위에 있으신 지 10년 만에 돌아가시므로[崩] 큰 뜻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후대의 사람들이 매우 애석해 할 일이다.

현종(顯宗)이 즉위하신 후 효종의 남긴 뜻을 이어서 항상 군사 대비에 마음을 두셨으나, 천성이 너그러우셔서 효종과 같이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셨다. 이때 오삼계(吳三桂)가 운남(雲南)에서 병사를 일으켜 중원(中原)이 어지러워지자 나석좌(羅碩佐)가 상소하기를, “오삼계와 결합하여 청나라를 정벌하소서.”라고 하였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숙종(肅宗) 때에는 윤후(尹鑴)가 북벌을 하자는 논의를 주창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에 전국이 기근을 만나자 청나라의 강희제(康熙帝)가 쌀 수만 석을 보내 이웃 나라를 구휼하고자 하는 뜻을 보였으나, 마침내 병자년의 치욕을 원통하게 여겨 북벌을 단행하고자 하다가 붕당(朋黨)의 내부 다툼이 심해서 시행할 겨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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