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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고사(近古史) - 제3편 학문의 부흥과 무예 쇠퇴의 시대[文興武衰時代]
  • 제16장 4색 당파(黨派)의 분쟁(分爭)
  • 제1절 4색 당파의 분열

제1절 4색 당파의 분열

선조(宣祖) 때에 동(東)⋅서당(西黨)이 처음 분쟁하였는데, 그 후에 동인(東人) 가운데서 이산해(李山海)와 유성룡(柳成龍)이 또 분쟁하였다. 이산해는 한성(漢城) 북쪽에 살고 유성룡은 조령(鳥嶺) 남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인이 모두 분열하여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이 되어 더욱 극렬하게 다투었다. 광해군(光海君) 때에는 북인이 득세하여 조정을 마음대로 움직이면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분열하여, 이이첨(李爾瞻)은 대북의 우두머리가 되고, 박승종(朴承宗)과 유희분(柳希奮)은 소북의 영수가 되어 서로 다투었다. 또 대북이 분열하여 중북(中北)⋅골북(骨北)⋅육북(肉北)⋅피북(皮北)이 되고, 소북은 분열하여 청북(淸北)⋅탁북(濁北)이 되더니, 인조(仁祖)께서 혁명을 이루셔서 이이첨 등을 주살하시자 서인(西人)이 권력을 잡았으나, 마침내 분열하여 청서(淸西)⋅공서(功西)가 되었다.

효종(孝宗) 때에는 송시열(宋時烈)을 등용하여 서인이 득세하였으므로 남인이 서인을 증오하였는데, 효종이 돌아가시자[崩] 자의 태후(慈懿太后)【인조의 비(妃)】가 입을 상복(喪服)의 제도를 논의하면서 서인은 기년(期年)1)죽은 사람과의 혈연 관계가 멀고 가까움을 따져서 상복을 입는 오복(五服) 중의 두 번째 복(服)인 기년복(朞年服)을 의미한다. 기년복은 1년 동안 자최복(齊衰服)을 입는 것으로 부친이 생존한 상태에서 모친의 상을 당했을 때 3년상을 1년으로 줄이는 장기(杖朞)와 조부모⋅아들⋅맏며느리⋅적손(嫡孫)⋅형제자매 및 3촌 관계의 친인척 상에 입는 부장기(不杖朞)로 구분된다. 서인은 자의 태후가 효종의 계모(繼母)이며,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장자(長子)와 차자(次子)의 구분 없이 1년이라고 규정한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근거하여 기년상을 주장한 것이다.을 주장하고, 남인은 3년복2)3년 동안 상복(喪服)을 입고 거상(居喪)하는 것으로 5복 가운데 가장 중하게 여기는 상례(喪禮)이다. 허목(許穆)을 비롯한 남인들은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장자의 상에는 3년상을, 차자의 상에는 기년상을 적용한다고 한 규정에 따라 효종이 비록 둘째 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을 주장하여 서로 분쟁하였다.

숙종(肅宗) 때에는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이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권대운(權大運)과 허목(許穆)은 좌의정(左議政)과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유배 보내고 남인이 크게 득세하였다. 이때 권대운과 허목은 준격론(峻激論)을 주장하여 송시열을 죽이고자 하였고, 허적과 민희(閔熙)는 온화설(溫和說)을 주장하여 허목의 논의를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허목이 말하기를, “허적을 제거한 후에야 뜻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상소하여 허적이 권력을 독차지하고 당여(黨與)를 길렀으며, 국정을 그르쳐서 백성들에게 해를 입혔다고 하여 그 죄를 논하였다. 그러나 왕이 허적을 더욱 우대하고 권대운과 허목 등을 축출하셨으니, 당시에 허적의 당파는 탁남(濁南)이라고 하고, 허목의 당파는 청남(淸南)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허적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축출되고 그의 당여도 모두 멀리 유배당하였으며, 점점 서인들이 등용되어 김수항(金壽恒)이 영의정이 되니, 남인의 세력이 이에 점차 쇠약해졌다.

숙종 6년(1680) 경신(庚申)에 인평 대군(麟坪大君)【인조의 셋째 아들】의 아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과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이 허적의 아들 허견(許堅)과 더불어 역모를 모의한다고 하여 주살하고, 허적과 윤휴(尹鑴) 등을 모두 죽였으며,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의 훈공을 문서에 기록하고 서인을 크게 임용하였으며, 남인을 모두 축출하였다. 이는 허견이 이정⋅이남과 약속하기를 숙종께서 붕어(崩御)하신 후에 왕으로 옹립하겠다고 남몰래 한 말이 발각된 것이니, 세상 사람이 모두 억울하게 여겼다. 이듬해(1681) 신유(辛酉)에는 김석주⋅김익훈 등이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또 허새(許璽)⋅허영(許瑛)이 변란을 꾸민다고 아뢰었는데, 일이 자못 의심스러웠던 까닭에 조지겸(趙持謙)⋅한태동(韓泰東) 등이 김익훈에게 죄를 주기를 청한 반면에 송시열은 김익훈을 변론하여 구원함으로써 서로 대립하니, 한태동 등에게 붙은 자는 소론(少論)이 되고, 송시열에게 붙은 자는 노론(老論)이 되어 다투었다. 그 후에 윤증(尹拯)이 송시열의 문하(門下)에 있다가 스승을 배신하고 소론에 합류하자 소론의 세력이 더욱 커졌으며, 서인이 모두 분열하여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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