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해(1489)에 [왕께서] 겸(兼) 장령(掌令) 이승건(李承健)으로부터 황해도 향시(鄕試)의 책문(策問)으로 악질(惡疾)을 구제하여 다스리는 방법을 물으니 영유(永柔) 훈도(訓導) 권계동(權季仝)이 “부처에게 빌면 구할 수 있다.”고 대답하였다. 왕께서 [권계동을] 먼 변경에 귀양 보내라고 명하셨다. 삼수군(三水郡) 인차외진(仁遮外鎭)에 성을 쌓고, 만호(萬戶)를 설치하였다. 인수 대비(仁粹大妃)가 불상(佛像)을 만들어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내니 유생(儒生) 이벽(李鼊) 등이 가져다 불태워 버렸다. [대비가 이벽 등의 죄를 다스리기를 청하자] 왕께서 “유생이 부처를 물리치는 것은 상을 줄 일입니다.”라고 하셨다. 검열(檢閱) 이주(李胄)가 아뢰기를 “옛 역사책에 ‘표정이 확 변했다.’는 것이나 ‘목소리와 얼굴색이 모두 거칠어졌다.’라거나 ‘용모가 태연작약하다.’라는 표현이 있는 것은 사관이 얼굴 표정 등을 봤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사관은 엎드려 일을 기록하니 옳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왕께서 사관에게 앉아서 기록하라 명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