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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원년(1506)

병인 원년(丙寅元年, 1506) 가을 9월에 이조 참의(吏曹參議) 성희안(成希顔), 지중추(知中樞) 박원종(朴元宗), 이조 판서(吏曹判書) 유순정(柳順汀), 군기 첨정(軍器僉正) 박영문(朴永文), 수원 부사(水原府使) 장정(張珽), 사복 첨정(司僕僉正) 홍경주(洪景舟) 등이 의거를 일으키기로 몰래 모의하여 훈련원(訓練院)에 모였다. 밤 삼고(三鼓, 삼경으로 밤 11시에서 새벽 1시 사이의 시간)에 창덕궁(昌德宮) 어귀에 군사들을 모아 놓으니 영의정(領議政) 유순(柳洵), 우의정(右議政) 김수동(金壽童)이 합세하였다. 무사들을 시켜 신수근(愼守勤), 신수영(愼守英), 임사홍(任士洪) 등을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연산군의] 총애를 받던 전동(田同)1)원문에는 전동(全同)으로 되어 있으나, 전동(田同)으로 바로잡는다., 김효손(金孝孫), 강응(姜凝), 심금손(沈今孫) 등은 목을 베어 죽였다. 동 틀 무렵 궁궐 밖까지 진군하여 유자광(柳子光), 이영남(李永男), 김수경(金壽涇), 유경(柳涇)이 군사를 나누어 궁궐을 지키고, 박원종 등은 왕대비에게 아뢰어서 임금(중종)을 경복궁(景福宮)으로 모셔 오고 연산군(燕山君)은 폐하였다. 연산군이 실시한 각종 제도를 혁파하고, 정국공신(靖國功臣)2)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하는 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공신호.을 정했으며, 여러 도의 정려문[棹楔]을 다시 세우고, 문묘(文廟)를 수리하여 위판(位版)을 다시 모셨다. 서총대(瑞蔥臺)의 돌을 철거하여 [그 돌로] 태학궁(太學宮, 성균관)을 세웠다. 폐비 윤씨(廢妃尹氏,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의 신주(神主)를 철거하고, 김굉필(金宏弼) 등의 관작을 추증(追贈)하였다.

겨울 11월에 연산군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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