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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원년(1545)

을사 원년(乙巳元年, 1545)에 우찬성(右贊成) 이언적(李彦迪)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여름 5월에 [왕께서] 제사하고 남은 산 노루를 산림에 풀어 주셨고, 경복궁(景福宮)으로 옮겨 가셨다. 김인후(金麟厚)를 수찬(修撰)으로 삼으셨다. 왕의 세자 시절 김인후가 춘방(春坊, 세자 시강원)에 들어간 것을 계기로 왕께서 [그를] 은혜롭게 대하는 것이 날로 커져 묵죽(墨竹)을 그려 하사하시기도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제술관(製述官)을 명하셨는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어버이의 병을 이유로 사임하고 돌아가 버렸다.

여름 6월에 왕께서 편찮으셨다. 대비(大妃)【문정 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를 창경궁(昌慶宮)에서 문안한 후 돌아오셔서 병이 더욱 심해지셨다. 마침 경회루(慶會樓) 기둥에 벼락이 쳤으므로 좌우가 왕께서 놀라실까 위로하였는데, 왕께서 “마음이 정해진 지 오래인데 무엇 때문에 놀라겠는가.”라고 하시고,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대비에게 문안하셨다. 유의(儒醫) 정렴(鄭磏)이 진맥하기 위해 들어오자 궁인(宮人)이 왕의 손을 당겨 꺼내려 하자 왕께서 손을 내놓으려 하지 않으셨다. 윤임(尹任)이 뜻을 헤아리고 궁인을 멀리 가라 손짓한 후에, [왕께서] 진맥을 허락하셨다.

가을 7월 삭(朔) 신유(辛酉)에 왕께서 승하하시니 양식을 싸 가지고 와서 곡하는 원근의 유생들이 도로에 끊이지 않았다. 왕의 아우가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시고 [선왕을] 고양(高陽) 효릉(孝陵)에 장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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