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대 국사 교과서
  • 개화기 및 대한제국기
  • 국조사
  • 태조(太祖)-선조(宣祖)
  • 선조조(宣祖朝)
  • 선조 26년(1593)

선조 26년(1593)

다음 해(1593) 봄 정월에 이여송(李如松)이 [양원(楊元), 장세작(張世爵), 이여백(李如栢) 등] 세 협장(協將)을 거느리고 진군하여 평양(平壤)에 접근하였고, [조선에서는] 도원수(都元帥)가 여러 진의 군사들을 합하여 [이여송이 이끄는 군대의] 뒤를 따랐다. 8일에 우리나라 군사는 남성(南城)으로 접근하고, 명(明)나라 절강 군사[浙兵]는 서성(西城)으로 접근하였다. 제독이 [군사들을 향해] 크게 소리치기를, “먼저 성 위에 오르는 자는 은(銀) 50냥(兩)을 상으로 주겠다.”라고 하였다. 낙상지(駱尙志)가 먼저 오르기 시작하고, [그 뒤를] 명나라 군사들이 따르니 왜병이 토굴로 후퇴해 들어갔다. 우리 군사도 잇따라 성으로 올라갔다. 제독이 장세작과 함께 대포로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여 [문을 부순 후] 군사를 정돈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이여송은 함구문(含毬門), 양원은 보통문(普通門)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가 왜군 1천 2백여 명을 잡아 참획(斬獲)하였고, 불태워 죽인 자도 절반이 넘었다. 고시니 유키나가[小西行長]가 [도망가] 연광정(練光亭) 토굴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야밤에 강을 건너 탈출했는데, 그때는 중화(中和)와 황주(黃州)에 주둔해 있던 무리가 이미 먼저 철수한 뒤였다. 송응창(宋應昌)은 안주(安州)에 진주하고, 이여송은 파주(坡州)에 진군하여 벽제역(碧蹄驛)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개성(開城)으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다. 함경도 길주(吉州)에 주둔하던 적의 무리가 도망하였다. 북변(北邊)이 다시 복구되었으니 이는 정문부(鄭文孚)의 힘이었다. 왕께서 의주(義州)에서 출발하시어 정주(定州)로 돌아와 주둔하시니 세자가 성천(成川)에서 종묘⋅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행재소(行在所)로 달려왔다. 이여송은 평양으로 돌아가 주둔하였다. 권율(權慄)이 왜병[日兵]을 행주(幸州)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살아남은 적 무리가 시체들을 네 무더기로 모아 놓고 불태웠는데, 우리 군사가 나머지 시체를 거두어 참획한 것이 150급(級)이나 되었다. 왕께서 [정주에서 출발하여] 영유현(永柔縣)으로 옮겨 가 주둔하셨다.

여름 4월에 송응창이 심유경(沈惟敬)을 왜영[日營]으로 보내 강화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여송은 개성으로 되돌아 왔다. 명나라 황제가 은 3천 냥과 산동(山東)의 쌀[糧] 10만 석(石)을 배로 운송해 주었다. 평양, 개성, 벽제(碧蹄), 왕경(王京)에서 전사한 관군을 위해 단(壇)을 설치하여 제사 지냈는데 단의 이름을 ‘민충(愍忠)’이라 하였다.

6월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인질로 잡았던] 두 왕자 및 재신(宰臣) 등을 돌려보냈다. 왜병이 진주(晉州)를 함락하였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그의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양산숙(梁山璹)은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종인(李宗仁)은 적들과 싸우다 남강(南江)에 이르렀는데 양 팔에 두 명의 적을 끼고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 문홍헌(文弘獻), 오빈(吳玭)1)원문에는 오와(吳訛)로 되어 있으나, 오빈(吳玭)으로 바로잡는다., 고경형(高敬兄) 등이 모두 죽었고, 김준민(金俊民)은 하루 종일 이리저리 옮겨 가며 각축을 벌이다 죽었기 때문에 죽은 곳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진주성 전투에서] 죽은 자가 대략 6~7만 명이나 되었다.

가을 7월에 이여송이 병사를 돌려 철수하고 왕께서 해주(海州)로 나아가 주둔하셨다. 왕비와 세자가 강서(江西)로부터 와서 모였고,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도 이르렀다. 심유경이 왜영(倭營)으로부터 돌아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平秀吉, 豊臣秀吉]가 정성을 들여 화의를 청하는 표문(表文)을 주어 가지고 오면서 그의 장수 고니시 히[小西飛]를 데리고 왔다.

9월에 송응창과 이여송이 유정(劉綎)과 오유충(吳惟忠)2)원문에는 오유순(吳惟順)으로 되어 있으나, 오유충(吳惟忠)으로 바로잡는다.을 머물러 있게 하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돌아갔다. 이여송이 처음에 조선으로 올 때에 얼굴에 난 수염이 매우 좋아 보였는데 영남에서 돌아온 뒤에 수염에 흰 털이 섞여 있었다. 왕께서 석성(石星) 및 이여송의 사우(祠宇)를 평양에 세우게 하시고 장세작, 양원을 배향케 하고는 ‘무열(武烈)’이라는 현판을 내리셨다.

겨울 10월 4일에 왕께서 경사(京師)로 환도하셨다. 정동(貞洞)에 있는 고(故)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집을 행궁(行宮, 임시 궁궐)으로 삼으셨다.

12월에 광주(光州) 유생(儒生) 김덕령(金德齡)이 수상(守喪)하며 집에 거처하고 있다가 그의 자부(姊夫) 김응회(金應會)가 권하니 의병을 일으켰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